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있다.
자장가
2024-11-21 07:49
전체공개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 곳곳에 있다. 그들은 과거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아마도 미래에도 생겨날 것이다.
그들이 작별하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이기도 하고,
그 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같이하기로 했는디, 이듬해 느이 아부지가 병을 얻어 약속을 못 지켯어야. 겨울에 임종할 때엔 야속했다이. 이 지옥에 나만 남겨놓고 가는 것이. / 하지만 죽은 다음의 세상을 나는 모른게. 거그서도 만나고 헤어지는지, 얼굴이 있고 목소리가 있는지, 반갑고 서러운 마음이 있는지 모르게. 느이 아부지 잃은 것을 가엾어해야 하는지, 부러워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가 알었겄냐.
그 어느 시간이기도 하다.
노인이 차를 끓일 주전자를 씻으러 마당으로 나갔다. 펌프질을 해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게 한 다음 두 번. 세 번 주전자의 안과 겉을 헹궈냈다. 그 밤에 군인들이 왔지. 네번째로 주전자를 씻기 시작했을 때 노인의 낮은 음성이 자막과 함께 화면으로 들어왔다.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 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그들은 그곳을 영원히 배회하거나,
경하씨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 김밥을 다 먹고 일어서기 전에 인선이 물었을 때 나는 얼른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 경하씨가 그 여자라면요. (...) 그때 돌아보지만 않으면 자유인데...... 그대로 산을 넘어만가면.
그 곳과 현재에 동시에 머무른다.
귀를 기울이는 듯 꼼작 않고 갓등 위에 않은 아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다.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미의 그림자를, 다른 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아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아버지가 그것들을 먹다가 문득 환상에서 빠져나오길 어머니는 바랬던 것 같아요. 그 방법이 정말 통하는 날도 있었어요. 내 손에서 귤을 건네받으며 아버지는 반쯤 웃었어요. 마치 두 세계를 사는 사람 같았어요. 한 눈으로는 나를 보고 다른 한 눈으론 내 몸 너머 다른 빛을 보는 것같이.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두고두고 생각한다.
그게 멈춘 게 언제였을까.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아갈라요, 말하지 않았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너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 사방이 너무 캄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생명은 쉽게 부서지고,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몇 시간 후면 아마는 얼어붙을 거다. 2월이 올 때까지 썩지 않을 거다. 그러다 맹렬히 썩기 시작한다. 깃털 한줌과 구멍 뚫린 뼈들만 남을 때까지.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떤 모습도 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굶주려 그랬는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배에서 숨이 끊어진 젖먹이를 젖은 부두에 놓고 가라고 경찰이 명령한 겁니다.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굴곡을 마주한다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이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몸과 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상처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견디며 삶을 이어간다.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그후로 엄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야기는 커녕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이 겪었던, 겪어야 하는 고통의 깊이를 짐작한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총에 맞고, / 몽둠이에 맞고, /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 얼마나 아팠을까? /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윌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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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사진을 본 것은 대학교에 갓 입학하고 뭔가 우쭐해져 있을 무렵이었다. 학생회관 앞에 게시된 대자보에 흑백으로 복사된 흐린 사진들이 여러 장 붙여져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였고, 대자보는 누군가에 의해 금방 제거되었지만 그 흐린 사진들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전까지 명확해 보였던 것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 내용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2016년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어릴 때부터 언제나 숙제처럼 갖고 있었던 것이 이 세상 어디엔가 가까이, 멀리,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주 생생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커다란 숙제였다.” 한강 작가에게 “글 쓰는 것은 질문하는 것”이었고, 그 질문은 무엇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느 시기에든 골몰하는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진척시켜보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된다(10월11일 〈매일경제〉 인터뷰).” _시사IN 896호 (기사링크: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326)
독후감이라는 맥락에서 몇 가지 생각을 적는다.
1.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겁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거나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작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 군중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수 많은 학자들과 실천가들이 연구하고, 제도를 만들고, 사람들을 교육해 왔고, 기술의 끊임없는 발전으로 생활환경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하지만 세상에서 야만적인 사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본성의 한쪽에 어쩔 수 없이 잔혹한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려되는 것은 본성이 어떠하든 인간의 창의성과 성취동기를 자극하여 경제적 성장을 이끄는 사회체제가 우선시 되면서 억제되지 않는 욕망이 수용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에 대한 상호의존과 연결성이 사라지고 타인에 대해 더 무감각해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야만적인 본성을 제어하는 사회체제가 갈수록 약해져가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부동산 사기에 대한 법원 판결문에서 좋은 구절이 있어 인용한다. (판단의 이유가 예외적으로 길고 자세하게 쓰여진 판결문입니다.)
수 많은 학자들과 실천가들이 연구하고, 제도를 만들고, 사람들을 교육해 왔고, 기술의 끊임없는 발전으로 생활환경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다. 하지만 세상에서 야만적인 사건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본성의 한쪽에 어쩔 수 없이 잔혹한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려되는 것은 본성이 어떠하든 인간의 창의성과 성취동기를 자극하여 경제적 성장을 이끄는 사회체제가 우선시 되면서 억제되지 않는 욕망이 수용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에 대한 상호의존과 연결성이 사라지고 타인에 대해 더 무감각해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야만적인 본성을 제어하는 사회체제가 갈수록 약해져가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다.
부동산 사기에 대한 법원 판결문에서 좋은 구절이 있어 인용한다. (판단의 이유가 예외적으로 길고 자세하게 쓰여진 판결문입니다.)
수익을 올리려는 개인의 경제활동 자체를 탓할 수는 없고, 이런 형태의 범죄를 촉발하는 전세제도나 금융시스템 등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이기는 하나, 자신의 탐욕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 탐욕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즉시 멈춰야 한다.
_ 박주영 부산지법 동부지원 부장판사 (전세사기 재판 판결문)
2. 복수와 진혼, 정의를 찾는 방법 - 죽고, 다치고,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해
늘 궁금하고 아쉬었던 것이, 잘못된 일과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영화처럼 '복수'하지 않고, '살풀이', '진혼'의 방식으로 죽고, 다치고,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직접적인 복수 혹은 처벌이 어려워서 그나마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씻김굿', '진혼제' 등등의 행사를 진행하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해 왔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조금 달라진 것은, 그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 '내가 잘못했고, 반성하고 있어', '네가 받았던 고통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해'라고 어떤 방식을 통해 표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례'가 전통적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의 해왔지만, 과학문명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여전히 중요한 의미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3. 역사에 대해
앞의 생각과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가의 잘못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하려 하거나, 이를 '애국심'과 연관시켜서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태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 지역, 성별, 연령, 소득 등의 '집단'을 기준으로 무언가를 나누고, 각각의 '집단'이 서로에게 '적'이 된다고 설파하는 방식은 실제 다른 목적에 의해 '동원되고, 이용되는' 경우임을 자주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정치 혹은 전쟁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시각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자신이 그 경우에 해당되면 우리는 객관성을 쉽사리 잃어버린다.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불리함의 시각에서 문제를 보려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멈추거나 후퇴하게 된다.
일본이 '위안부' 관련된 사실들을 부인하는 것을 비난한다면, 동일한 시각과 기준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독일 사회가 오랫동안 홀로코스트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유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반인도적 사건의 궁극적 원인을 시민들의 정치의식 부재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치적 성향과 선택에는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자유·인권·평화·관용·참여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서는 양심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독일에서 홀로코스트 교육은 단순히 과거사 교육이나 역사 교육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육이다. 현재나 미래와의 연관이 없다면, 역사 교육은 힘을 잃는다.
일본 학자 네 명이 우파의 역사전을 비판하고 있는 〈바다를 건너간 위안부〉(어문학사, 2017)에서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12·28 합의를 이렇게 질타한다. "일본 정부 및 일본 국민은, 한국 측이 '또다시 문제 삼지' 않으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야말로 21세기 세계 조류를 무시한 사고방식이며 동시에 잘못된 생각이기도 하다.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하여' 몇 번이고 이 문제를 '가슴에 새기는' 것이야말로 '똑같은 실수를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는' 길로 이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_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사IN, 2018년 1월 23일
4.
이런 내용의 책은 읽으면서 계속해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자료를 조사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생각하는 과정은 아마 나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글이 사실의 무게를 감내하지 못할까봐 끊임없이 고민한 흔적들을 보면서 '좋은 책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월한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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