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저자 클레어 키건을 두고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라고 평한다. 10여 년만에 나온 114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두고 이보다 완벽한 이야기는 없을 거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출간 직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을 때 책의 메시지가 의미 있어서 좋은 책이라 생각하면서도, 세간의 평가가 너무 과하지 않나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 특히 평론가들이 좋다니깐 좋은 작품이겠거니 했다. 책 마지막에 수록된 ‘번역가의 말’에서 홍한별 번역가는 초벌 번역을 하고 다시 읽을수록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의미가 담겨 있어 놀랐다며, “언어의 구조는 눈결정처럼 섬세”하며,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고 했다. 궁금했다. 나에겐 그저 인물, 사건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해 보이는 말들이 왜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의미로 선명하게 다가오는지.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으면서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았다.
누가 옆에 데려다 놓고 앉아서 하나씩 가르쳐주지 않으면 배우기 힘든 것들이 있다. 단편소설 읽기도 그 중 하나였다. 읽고 나면 뭔가 심심한 게 (제대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평양냉면 같았다. 줄거리라기엔 장편에 비해 단순했고, 기억에 남을 만한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손더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이제껏 읽었던 단편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작가들이 쓰는 방식대로 쓰고 싶어졌다.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와 <구스베리>편에 대해 하나씩 얘기하고 싶다. (사실 아직까지 읽은 게 딱 두 편이기 때문인데, 모임 전까지 무조건 다 읽고 가겠습니다. 늦게 읽기 시작한 게 후회될 정도로 너무 재밌어요.ㅠㅠ)
우선 <마차에서>부터! 단편에는 낭비가 없다. 한 문장 한 문장 반드시 의미를 품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둔 단편읽기는 작가의 내면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예측하는 재밌는 추리게임과도 비슷하다. 사소해보이는 문장에도 인물의 배경이나 성격, 인물들 간의 관계,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과의 관계, 세상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시선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들이 녹아있다. 그런 것들을 포착하는 재미가 있어야 첫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그 다음 문장으로 이어지는 동력이 생긴다. 가끔 소설을 읽다가 ‘왜 이런 표현을?’ 싶은 대목을 발견하면 그저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려고 살짝 곁들인 장식처럼 여겼는데, 여기에 ‘왜?’라는 질문을 더할수록, 각종 정보를 끌어들여 추측을 더할수록 이야기에 대한 이해는 깊어지고 메시지는 명확한 한 줄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답할 수 없는 인생의 질문들로 치환되었다.
쓰는 사람으로서 배운 점도 있다. 최근 ‘가지치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관련 경험들을 엮어서 글을 썼다. 요약하면 이렇다. 운영 중인 공간에 벌려놓은 일이 많아 하나씩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아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게 앞을 지나던 어르신께서 입구쪽에 심어놓은 방울토마토가 가지치기가 안되어 무성한 나무가 된 것을 발견하시고는 나오라고 손짓하셨다. 나도 모르게 할머님께 절박하게 도와달라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씀 드렸고, 할머님께서는 단호한 손길로 곁가지들을 툭툭 잘라내셨다. 며칠 뒤, 믿음직한 지기들이 운영하는 대전의 한 책방을 찾았는데, 그곳에서도 단호한 조언을 들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마음껏!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하면서 글로 적는데 단편소설처럼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겨두었던 것들이 속수무책으로 커지면서 감당 못할 수준이 되어 버린 일들이 방울토마토 가지치기와 비슷했다. 길가던 할머님의 도움과 책방지기님의 조언이 겹쳐졌다. 모두 ‘돌봄’의 손길이었다. 공통적으로 과감하고 단호했다. 누군가를 억압하고 깎아내리려는 힘이 아니라, 잘 자라고 살아내도록 도와주는 힘, 돌봄. <마차에서>편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각색해서 단편으로 바꿔서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손더스의 마지막 말처럼 ‘책임 지는’ 예술가의 마음으로.
두 번째로, <구스베리>편. 책을 독후감 마감까지 다 읽을 수는 없으니 한 편만 더 읽자면서 고른 것이 책 원제 “A Swim in an Pond in the Rain”과 같은 챕터 <구스베리>편이었다. 우연히도 ‘곁가지’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되어서 가지치기에 대한 생각과 맞물려 흥미롭게 읽었다.
체호프의 단편 <구스베리>에는 인물들이 연못에서 수영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소설의 상당량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을 삭제했을 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건 단편 서술의 경제성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 너무나도 놀라웠던 점은 손더스의 해석을 읽기 전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강력히 밑줄을 그었던 부분이 바로 이반 이바니치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설교였다. 행복한 사람들이 자기 만족에 취한 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나 세상은 외면한다는 말, 그러니 선한 일을 하라는 말. 좋은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말들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고, 여기에 위배되는 인물들은 ‘악’의 편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손더스의 해설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밑줄 친 부분이 죄다 부끄러워졌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조금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니… 강력했던 메시지를 허무는 단서 하나가 이야기 전체를 다른 관점으로 재배치했다. 말과 행동의 모순, 무언가를 강력히 비난할수록 그것에 강력히 사로잡혀 있다는 인식,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 돌봄에 대한 인식 등, 수많은 생각거리들이 촘촘히 얽혀 삶을 다층적으로 보여줬다. 놀라운 것은 <구스베리>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 바로 ‘쓸데없이’ 길게 서술된 수영 장면, 바로 ‘곁가지’였다!
“내가 왜 그렇게 곁가지를 뻗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는지 보이지? 나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 여지를 좀 주고, 그래서 내가 행복에 반대하는 일차원적 입장을 밝히는 논문으로 그치는 걸 피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무언가가 되어 몇 번을 읽더라도 계속 너에게 새로운 차원을 드러내려는 것인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을 조지 손더스는 이 에세이에서 완전히 놓치고 있어.”(p. 525)
주제와 밀접한 것들만, 밀접해 보이는 것들만 남긴 글은 갓 가지치기를 마친 나무처럼 홀쭉하다. 선명하지만 한 번 보고 다시 볼 의향은 없다. 글을 쓸 때 자꾸만 주제의식에 사로잡혀서, 경제성의 원칙에 입각해 군더더기를 없애라는 말을 일차원적으로 이해해서 곁가지의 중요성을 잊고 있었다. 이건 엄청난 꿀팁이다! 그리고 삶에서 곁가지를 잘 쳐내지 못한 채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내가 시도하면 좋을 법한 방법이다. 나의 첫 단편소설이 될지도 모를, 방울토마토 가지치기 이야기에서 곁가지로 등장할 소재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조언도 열렬히 공감했다. 산문을 쓸 때 “자신의 취향 그대로 ‘힘차게 장난질을 치기’ 시작하면 그 구절은 더 고도로 조직화된 체계가 되어갈 것이다.” ‘힘차게 장난질을 치기’!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며 정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그대로 힘차게 밀고 나가기, 놀이하듯이! 쓰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을 넘어 재미있는 놀이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강하게 긍정하고 표현하는 힘이 필요할 것 같다. 이건 ‘나는 나’처럼 자아를 과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꼼꼼히 고민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천천히 끈질기게 밀어부치는 방식에 가까울 것이다.
“선택하고, 또 선택하는 것.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다.” (p.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