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경험은 정말 멸종하는 중인 것일까?

<경험의 멸종> - 크리스틴 로젠 독후감

땡초맛 새우깡
2025-07-16 21:08
전체공개
1. 인간 경험이란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경험’의 측면들을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 삶에서 ‘배우는’ 것에 대한 모든 영역이 다뤄지고 있는데-감각(오감), 대면 상호작용(소통), 손(인지), 기다림(정서), 감정, 쾌락(만족), 장소-굉장히 폭넓은 영역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은 1) (기존) 경험(개념)이 멸종되는 변화는 피할 수 없고, 2) 속도는 점차 빨라질 것이며, 3) 경험의 편향성이 문제되지만, 4) 각 개인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 ‘간접’ 경험은 경험은 '직접' 경험 대비 어떤 의미를 갖는가?
- 현재 ‘인간다움’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진리처럼 변하지 않을까?
- 개인화의 최종 도달 지점은 고립 또는 유리disengagement 인가?
   
2. 인간의 경험(개념)도 변화(진화)하는 중이라면? (거의 과대망상인가 싶으면서도 호기심이 든다)
‘경험을 통한다’ 라는 과정과 ‘인간다움’에 대한 것도 변화(진화의 관점에서...)중인 것은 아닐까? 경험의 멸종도 ‘과거’의 경험을 통한 성장 방식을 ‘미래’의 경험으로 기술의 도움을 받아 확장중이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 잠재성은 아직 완전히 발현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과정에서 인문학적 고찰, 감정 등은 반대급부로 경시되고 궁극적으로는 소실되는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인간이 결국 동물(영장류)일 뿐이라 이런 기술적 속도를 ‘진화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힘에 부치다보니 많은 문제점(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질환/사회적 현상(히키코모리 등), 부적응 등)이 생기고 있는게 아닐까. 

3. 기술의 영향은 더 크고, 더 넓어질 것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관계없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위의 세상과 어울리는 대신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제 현실은 더 이상 합의의 결과가 아니다.” // “기술이 개인의 경험을 데이터화하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기술이 뒷받침 되다면, 시공간적 제약과 비효율(잘못된 인식이나 체감, 또는 해석의 다양성)이 따르는 ‘개인적인 경험’ 보다는 더 많은 데이터로 정제화된 경험을 ‘간접’  수용하는 것이 나쁜가? 내가 가진 제약적 시간을 효율적이고, 데이터를 통해 ‘맞다’라고 판단하는 곳에 사용(먼저 가본 누군가의 리뷰를 활용하는 것 자체)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사회에서 겪는 나의 제한적인 경험은 (개인적으로 충분히 의미있을 수 있지만) 실상 ‘쓸모’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반화할 수 없고, 해당 경험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효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일궈온 변화들은 사실 필요에 의한 것이므로 부정적 요소(경험의 소멸, 인간다움의 상실 등)이 수반될 수 있지만 불가피한 결과라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었다. 냉소적 입장일 수도 있지만, 실상 사회는 우려하고, 피하고 싶은 방향(특히 이기나 이익에 따른 것이라면)으로 변화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당위적 개념 또는 이상적, 전지구적, 기후적 가치 등이 그 중요성과 의미에 비해 인간 삶 대비 너무 거대한 나머지 실행에 어려움을 겪듯이 말이다.
   
4. 나는 개인화를 긍정한다. 그리고 기술은 더 개인화를 강화, 지원할 것이다. 
서비스,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고객경험’,‘학습경험’ 이런 식의 단어가 있는데 대면경험이 개인경험으로 변화하는 중이라 생각한다. 경험을 강조한 용어가 유행하는 시점에 ‘경험의 멸종’이라니 아이러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집단/대면적 경험이 개인화 하면서 ‘경험’의 의미가 달라진 거라고 생각하는게 맞는 것 같다. 경험의 멸종이라기 보다 어떤 개인에게도 맞출 수 있는 수준, 그런 선택권을 줄 수 있도록 산업이, 기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화될거라 생각한다. 
   
5. 경험의 쏠림은 위험성이 있다.
경험의 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경험의 편향성, 특히 ‘피하고 싶은 경험’에 대한 결핍은 장차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 될거라 여겨졌다. 긍정적인 것만, 효율적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한편에는 새로운 것, 예상치 않았던 것과 조우를 통한 즐거움, 위기 대응과 같은 측면을 기피(심지어 겪지 않도록)하게 되는데 삶에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맞딱뜨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리 ‘겪지 않아 훈련되지 않은’ '경험 취약/결핍자'들의 대응력이란? 실상 좌절, 심각한 붕괴로 밖에 예상되지 않는다.
   
6. 변화의 흐름에 탑승할 수 없는(소외) 또는 낙오하는 그룹(이탈)이 반드시 있다. 누가 구제할 것인가는 별도 고민이 필요하다.
‘개인화’ 추세 속에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인이 돼서 선택적으로 ‘개인화’하는 것과 청소년이나 노인과 같이 (사회적)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의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들(고독사, 정신질환, 애정/애착결핍 등)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가정, 마을 등이었겠지만, 차츰 학교, 정부 등으로 책임이 ‘떠넘겨’졌고, 끝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학교, 정부 역시 이 책임을 수행하다가 병들었다고 생각한다(선생님 지위의 하락, 공무원의 자살 또는 퇴사). ‘케어’의 본분은 가정, 마을(커뮤니티)에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특히 케어가 목적하는 안정성을 위해서는 지속, 일관, 애정 등을 요구하는데 이건 ‘타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감정’을 가진 인간이 지속, 일관, 애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을 위한 별도의 케어-정신적 안식처, 금전적 보상, 치유를 위한 주변의 배려 등-도 있어야 하는데 정신적 그물망은 점차 와해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개인화’ 경향이 강해질수록 집단적 기능에 대한 향수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급부적인 피할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개인지향성이 강해질수록 기존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공존, 공영, 공생에 따른 연대와 사회적 애착관계와 지지, 도움, 관심, 배려..이런 가치들은 더 약화될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자살이나 도피-사회적 이탈 현상-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증가할 것이다. 한편 개인화된 세상을 ‘누릴 수 있는-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겪는 세상은 훨씬 빠르고, 정확하며, 편리해질 것이다. 빛과 어둠처러 빛이 강해질수록 어둠이 짙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회적 책임을 누가 져야할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7. 유일한 희망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 소멸되는 이때에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삶 차원에서 ‘자정’작용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경험을 ‘큐레이팅’해준 특정 기술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내 삶이나 행동에 충분한 가이드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해당 기술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저자는 이런 식의 결핍이 발생하면, 해당 기술에 더 집착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풍부한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과 감정, 성숙 등을 학습이던, 업무던, 놀이던 한번 경험해본 사람은 그런 경험을 더 추구하는 경향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주는 편리와 재미를 모두 거부하기 보다는 적절히 이용하면서도 나라는 개인의 성장을 위한 수단을 선별할 줄 아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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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더듬이 | 15일 전
관점과 사고의 틀이 분명해서 좋습니다. 그래서 한번 즐겁게 도전해 보고 싶은 관점이고 틀이기도 하네요. 글 안에서도 충돌하는 지점들이 많이 보이고요. 함께 이야기해 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요. 기대가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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