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닿는 사람

<경험의 멸종> - 크리스틴 로젠 독후감

봉천동 조지오웰
2025-07-17 01:40
전체공개
오 왔다!. 이제는 익숙한 소리, 바로 마당에 들어오는 오토바이 소리. 나는 한달음에 나가 우체부 아저씨를 반겼다. 이 기대감은 알림이 울린 스마트폰을 재빠르게 들여다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퇴사 후 경북 영덕 영해로 온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영해로 오기 전 나는 SNS에 상태 메시지를 변경했다.  "당분간 연락은 편지로만 가능합니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77-32 번지'로 보내주세요."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의 주소들은 수첩에 적어왔다. 핸드폰은 서울집에 두고 왔는데, 여기서 한 달을 더 보낸 뒤에 서울로 돌아가 일을 구할 것이다. 

이 무모한 결단을 하기 전 돌이켜 본 적이 있다. 지난 두 달간 업무적인 연락을 제외하고 당장 확인이 필요한 연락이 있었는가? 아니. 그럼 왜 그렇게 스마트폰 알림에 조건반사처럼 달려들어 확인해야만 했는가? 그렇다면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천천히 주고받아도 되지 않는가? 간편하게 보낼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닌, 노고라는 허들이 있다면 가벼운 내용의 메시지는 자동으로 걸러질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허들을 넘을 의지만 있다면 메시지는 더 깊어질 것이다. 나는 그게 바로 편지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가 세상에 연결되는 방법은 편지 또는 물리적으로 만나는 수밖에 없다. 마치 119 처럼 24시간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끈은 끊어졌다. 

내가 들어온 곳은 친할머니 집이다. 초등학생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쭉 비어있었고, 식구가 가끔 와서 집을 돌본다. 오랜만에 오니 마당에 풀이 무성했고 보일러는 고장나 차가운 물만 나왔다. 나는 낫으로 억센 풀을 정리하고, 영해 시내에서 부품을 사와 보일러를 수리했다. 스마트폰이 없어서 많이 헤맸다. 철물점에 가서 사진 없이 필요한 부품을 설명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는데, 검색과 사진이 우리에게 큰 편리함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보통 같았으면 돈을 지불하고 보일러 수리 기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시간이 많고 이런 것쯤은 각오하고 왔다. 사실 내심 시골집에 내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기를 바랐다. 

둘째 날부터 여유가 좀 생겼다. 수첩에 적힌 주소들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연필이 종이에 닿은 순간 글이 글을 불러 나도 내가 쓴 글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구나.. 우리 사이의 의미들을 발굴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편지를 쓸때는 내가 쓴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서 따로 보관했었다. 정성껏 쓴 편지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이 편지가 내 손을 떠나면 다신 만날 수 없겠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도 답장 하나 없었다. 서운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썼다.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났을 때 드디어 첫 답장이 왔다. 뛸 듯이 기뻤다. 그 뒤로 편지가 조금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우체부 아저씨의 턱 밑에 난 긴 털까지 기억하게 됐다. 나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퍼졌는지 내게 먼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원래 가깝지 않은 사이였지만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그 사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보다 내가 그 사람을 더 깊게 아는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내게 도리어 고마워했는데 답장을 기다리는 설렘을 느낀 게 오랜만이라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 누군가의 답변을 받는데 6~8일이 걸리는 경험을 어디서 할 수 있을까? 나도 그렇지만 이분들도 느리고 농도 깊은 소통에 목말라 있던 게 분명하다. 

한 번은 편지를 통해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다. 오랜 친구가 오기로 한 것이다. 쉽게 연락이 가능한 만큼 쉽게 약속을 취소하는 요즘이지만.. 이번 약속은 달랐다. 취소가 번거롭고 약속이 3일 남았을 때는 취소할 수도 없다. 약속 시간전에 취소 편지가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 한 명은 약속 장소에서 하릴없이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친구는 약속 시간에 영해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동안 친구가 올지 안 올지 버스 시간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조마조마했다. 평소 같았으면 카톡 한 번으로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떤 변수가 생긴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큰 기대와 설렘이 찾아왔다. 버스가 올 때마다 내리는 한 명 한 명을 주시했다. 친구를 놓칠세라, 그래서 길이 엇갈릴까 봐.

이 경험으로 잘 사는 방법을 조금은 더 알게 된 것 같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잊지 말아야지

(이전부터 바라왔던 체험을 상상으로 써봤습니다.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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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더듬이 | 16일 전
"노고라는 허들이 있다면 가벼운 내용의 메시지는 자동으로 걸러질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허들을 넘을 의지만 있다면 메시지는 더 깊어질 것이다."
"내가 이 사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구나. 우리 사이의 의미들을 발굴하는 느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카톡 한 번으로 확인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떤 변수가 생긴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큰 기대와 설렘이 찾아왔다."
뭉클한 대목들입니다.
경험을 하지 않고도 이런 픽션을 쓸 수 있군요. 아니, 어떤 경험의 파편들과 열망이 만들어낸 꿈이겠지요. 꿈은 간절히 열망하면 이뤄진다지요. 잘 읽었습니다.
이빠진소설 | 14일 전
아.. 내가 해보고 싶던 것을 누군가 실천했구나! 했습니다. 글 읽으며 값진 대리 경험을 했습니다, 라고 댓글을 적으려다가 마지막 문장에 살짝 배신감을 느끼는 경험을 했습니다 🤣
봉천동 조지오웰 | 14일 전
ㅎㅎ 다음에는 진짜 경험을 만들어오겠습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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