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머리 밖' 세상,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시대에 '개인성'을 지키기
자장가
2024-06-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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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지막 부분의 '감사의 말'에서 저자는
'이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나도 출판사도 예측하기 힘들다. 탐구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복잡한 논증을 풀어내야 했는데, 독자에게는 골머리를 썩여가며 책을 읽을 만한 끈기가 없다고들 하니 말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그 부분이 걱정되었는지, '시작하기 전에', '프롤로그', '에필로그' 등을 통해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몇 번씩 요약해서 설명한다..
먼저, '시작하기 전에'라는 짧은 챕터를 두고 '복잡한 논증'이 진행된 맥락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있다.
문장을 재구성한다면,
- 우리가 스스로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자율이라는 이상을 강조하는 교육법과 고요히 집중하는 시간을 앗아가는 공적 공간의 분위기 같은 우리 문화의 기묘한 특징'이 우리의 인지에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 현재의 주의력 위기를 파악하고 '인류 번영의 가능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사물과 타인을 대면하는지에 대해 더 적절한 설명이 필요하고 이를 '철학 전통의 몇몇 비주류 사조에 기대어' 찾아 보았다.
- (인류 번영의 가능성을 되찾기 위한) '자율성과 집중력 회복 방안'의 실증적 사례를 다양한 숙련노동 분야 종사자들에게서 찾아 보았다. 이들이야말로 이 주의산만의 시대에서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확고한 목표와 꾸준한 계획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
가 될 것이다.
책의 부제가 'On Becoming an Individual in an Age of Distraction' 로 지어진 것은 책의 '목적'을 가장 간결고 정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요약해서 설명한다. 특히, 걱정했던 논증부분과 관련해서
-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얻는가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개인주의가 계몽주의라는 특정한 정치적 맥락에서, 우리를 권위로부터 해방하려는 비판적 의도로 생겨났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자들이 지식의 토대로 제시한 급진적 자기책임성은 지식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우리가 배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듯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했다. 개인성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다? 개인주의와 다른 토대에 놓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헤겔의 도움을 얻어, 우리가 세계와 자신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독립적 판단력을 성취하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타인과 부딪치고 갈등하고 협력하면서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타인은 일반적인 것의 '표상', 즉 추상적 공증이 아니라 구체적 타인이어야 하며 이들에 맞서 우리 스스로를 차별화해야 한다.
- 우리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자율 운운하며 문화적 반사 작용으로 지속되는 계몽주의의 유산이, 주의력이 조작되는 온갖 수법에 비판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와 같이 정리하면서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신신당부한다.
나 역시 그가 걱정했던 독자에 나도 포함되었다. 책의 논증 부분에서 집중력을 유지하고 머리 속에 이야기의 '지도'를 차분히 그려 나가는데 실패했다. 마치 낯선 길을 운전해 가면서 '네이게이션'이 알려주는 방향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왜 그 경로를 통해서 거기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스스로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과 비슷했다.
아마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는 저자가 설명을 전개하는 영역인 '철학'에 대한 나의 무지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많은 (주류)철학자들의 생각과 주장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 이렇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다른 (비주류)철학자의 사상을 통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저자의 설명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익숙치 않은 논증 방식 때문이다. 저자는 정치철학자이자 모터사이클 정비사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설명을 '정치철학자'와 '메카닉'의 시각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정치철학적 설명 프레임과 개인적 주체성 획득 과정 사이에 무언가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게 무엇이 될지 명확하게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집단 행동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의 다양한 욕구와 동기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 역시 '에필로그'에서 '내가 연구한 것은 정치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히고 있고, 자신의 논증 방식에 대해 '지금까지의 논쟁이 부분적이며 온전히 자명하지 않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계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네비게이션을 따라 지나온 경로를 이리저리 되돌아 보다가, 지도로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몇 개의 이정표를 요약하는 것으로 정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 요컨데, '앎'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내 머리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환경의 상호 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이다. 그 결과는 나의 행동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고('행위주체성'), 환경의 영향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데,('위치구속성') 우리의 머리(뇌)는 그 모든 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산해서, 합리적인 인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로봇'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몸(경험)을 통해 생각하며, 그 경험은 타인들(과 언어자원)의 비판을 거쳐야 한다.
- 현대의 '자유주의'는 이러한 실제와 떨어져서, 세상의 심적 '표상'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수단이며, 이 과정은 전적으로 두개골의 경계안에서 일어난다는 가정을 고집한다. 이러한 '자유' 아래에서 개인의 '주의력'을 잠식하는 모든 수단들이 용인되며, 우리는 일관된 '자아'를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에서 출발한 잘못된 가정들을 인지하고, 인간이 행위와 지각의 상호 얽힘을 통해 '능숙해지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과거의 혹은 현재의 '타인'들과 함께 하는 과정('공주의')을 통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자아, 개인성을 성취할 수 있다.
-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행동'하고 '타자'의 '비판'을 받는 것이며, 동일하게 타자에게 비판하는 또 다른 '타자'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시간'과 '주의력'과 '생각'이 사업가들에게 조종 가능한 재화로 활용되는 시기에 대한 우려는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는 인간 심리의 취약점을 이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앱에 가끔씩 도파민을 공급해 사용자가 계속 빠져들게 해야 했습니다. 저와 마크 저크버그, 케빈 시스트롬(인스타그램 창립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어쨌든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_Jonathan Haidt, "The Anxious Generation", 피우스의 블로그에서 재인용 (https://blog.naver.com/jeunkim/223477758740)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우려 혹은 경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경제 주체들이 돈이 되는 수단들을 포기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결국, '자아' 혹은 '개인성'을 지키는 일은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것은 개인 단위에서는 스마트폰의 사용을 줄이는 등의 소비 주체로서의 행동을 교정해 나가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함께 하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숙련된 전문가가 되어 각자의 가치를 입증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는 주체가 되는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 밖에 진짜 세상이 있음을 인지하고, 개인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책의 제목-The world beyond your head: On Becoming an Individual in an Age of Distraction-은 그런 맥락에서 적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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