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와 할매

<할매> - 황석영 독후감

희락 프로필 희락
2026-05-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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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자연을 표현하는 부분이었다. 어떤 나무인지, 어떤 새들인지 묘사하는 부분을 보며 바로 전에 읽었던 월든이 생각나서 괜히 반갑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책도 좋은 에너지를 받게 되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용은 많이 어둡고 현실적이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았고,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집중하게 되었다. 가슴 아픈 부분들도 많았는데,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내가 함부로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씁쓸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읽다가 문득 고등학생 때 썼던 시가 떠올랐다. 제목은 '전봇대'였는데,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면서 편견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고 길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전봇대와 할매는 다를 수 있지만, 한 자리를 오래 지키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어준다는 점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친구들은 이 시 때문에 나를 전봇대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니, 그때의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괜히 기뻤다.

자연과 생명을 조금 더 소중하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 속에서는 탄생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가치한 삶은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결국 믿음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의 믿음이 할매를 지킨 것 같기도 하고, 또 할매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 공간을 지키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할매를 보며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있는 나무들도 생각이 났다. 올라갈 때마다 오래된 나무들의 몸통을 한 번씩 만지고 내려왔는데,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와서 그런지 더 큰 교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생각했던 그대로, 전봇대와 할매처럼 누군가에게 의지와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봤는데, 읽으면서 느꼈던 분위기와 감정이 정말 비슷하게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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