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을 읽다 보면

더듬이
2025-06-26 08:23
책 읽기 모임을 하다 보면 함께 읽은 책보다, 읽고 난 사람들이 제각기 써 내는 예상 밖의 감상문들이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아주 많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글쟁이(요즘 AI 작문기가 이렇지 않나?)의 글보다, 마지못한 듯 시작해서 꾸역꾸역 이어가다 허둥대다 비틀대다 그러면서도 반짝반짝 제 빛을 발하며 쓰러지거나 자빠지지 않고 기어이 제 걸음을 찾아 가는 (제 걸음이라고 했지 목적지라고는 하지 않겠다) 구멍투성이의 글을 읽다 보면, 바로 이것 때문에 저 보란 듯 고명하신 분들의 책을 모셔와서 우리 앞에 두는 것일 뿐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밖에도 책 읽기 모임이 좋은 이유는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이거야말로 개중 특별히 밝게 빛나는 별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얀 백사장의 모래를 한 줌 퍼서 꼭 쥐어 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모래알은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빠져 나가고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반면, 너른 갯펄의 찰진 진흙을 한 손 가득 퍼 담아 본다. 검푸른 진흙덩이는 손자욱까지 고스란히 내 손위에 남아 있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주물러 본다. 찰흙은 유순하게도 내 손에 온몸을 내맡긴 채 내 다음 손길만 기다리고 있다. 나는 좀 더 자신감을 발휘해 이런 형상 저런 형상을 빚어도 본다. 이번에도 역시 찰흙은 고분고분 내 손이 빚어낸 그대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말은 백사장의 모래 같다. 잠시 손 안에 쥘 때 한가득 느껴지지만 이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고 나면 없다.
글은 갯펄의 진흙 같다. 내 손길 닿는 대로 내 손으로 빚어진 대로 형상을 내내 간직한다.
얼마 전 한글박물관에서 의뢰가 와서 글을 구상 중이다. 자료를 찾아 읽다 보니 한글(당시엔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마음이 감동적이다.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뭇 백성이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고 읽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응집체인 말을 그때그때 마음대로 받아 적고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선물 같은 글을 우리는 가치 있게 사용하고 있는 걸까?
우리 말에 맞춤한 한글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찰진 진흙은 없고 성긴 모래만 있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두고 볼 수 있는 형체라고는 아무것도 빚어낼 수 없는 신세일 것이다.
말할 수 없이 편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한글로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을, 그 속의 다양한 삶의 무늬를, 내가 만난 사람, 바라는 사람의 이런저런 형상을 마음껏 빚어 보고 두고두고 볼 수 있어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리하여 종국에 글은 요동치거나 부유하는 삶에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부여하는 거푸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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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단지 | 9일 전
허둥대고 비틀대면서도 빛을 발하며 기어이 제 걸음을 찾아간다는 말이 참 와닿습니다. 역시 잘 쓰려는 마음보다 솔직하게, 나답게 쓰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잘 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 ^^;
선물 같은 글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금요일 아침이 더욱 행복해졌습니다.
F동 사감 | 9일 전
그 빛이 제 눈엔 안 보여도(빛에겐 아마 어둠밖에 안 보일 걸요) 다른 눈에 다 보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