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에서 기어온 달팽이 엽서

여름노을
2025-06-30 20:03
집으로 돌아오니 로비 복도 우편함에 뭐가 들어 있다.
열어 보니 자그마한 사진 엽서다.
낯익은 깨알 글씨로 가득한 사연 오른편 위쪽에 밝은 보라색으로 우체국 소인 두 개가 엇비슷하게 겹쳐 찍혀 있다.
들여다 보니 하나는 '동해우체국-요금후납'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고, 그보다 약간 더 큰 도장엔 '추암 일출, 동해, 2024.6.5'라는 글자며 숫자와 함께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인 추암을 그려 넣은 판화가 새겨져 있다.
엽서 맨 아래엔 이런 안내문과 함께:
"이 관광엽서를 '행복+우체통'에 넣으시면 동해관광의 즐거움과 행복한 추억을 1년 후 전해드립니다."

1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약속대로 '1년 후'  수신처에 무사히 잘 도착한 셈이다.
함박 미소를 입가에 물고 왼편에 적힌 깨알 글씨를 읽어 내려간다. 
"오늘은 2024년 5월 19일 일요일 날씨 [햇님 모양의 그림], 이곳은 동해 묵호전망대 [이번엔 등대 그림]
계단에 앉아 편지글 시작합니다."
이렇게 첫 줄을 시작한 글은 마지막 행을 이렇게 맺었다.
"엽서가 1년 후 잘 도착하고, 우편함에 있는 이 녀석을 잘 발견해주시길."

오래전 북유럽 여행 때 만난 가족 일행 중 '꼬맹이'로 만난 친구가 어른이 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다가는 간간이 이렇게 현지에서 엽서를 보내오곤 한다. 그때마다 감동으로 울컥한다.
이번엔 묵호다. 나도 가본 곳이어서 더 반갑다.
등대 앞 계단에 앉아 엽서를 써 내려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빛의 속도로 오가면서도 잠시도 기다리기를 어려워하는 이 시대에, 1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이 거북이, 아니 달팽이 엽서에는 1년이라는 긴 시간이 누적되어 생긴 무게와 밀도가 소복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시간을 지금 너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 거니? 작은 엽서 앞에서 나는 고개 숙인 '꼬맹이'가 된다.

이 모든 것이 1년 전 그 친구의 무심하지 않았던 시선과 정성 어린 손길이 낳은 결과다. 그로 인해 오늘 내 일상은 별안간 특별한 색을 더하게 되었고, 그만큼 내가 보는 세상은 한결 더 아름다워졌다.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도 깨알 같은 아름다운 변화의 씨앗이 착지하지는 않았을지.

삶은,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행하는 것들로 이뤄진다.

우선 감사의 문자를 보낸다.
장마가 끝나는 대로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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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단지 | 4일 전
글을 읽다 보니 덩달아 뭉클해지네요. 저도 내내 미뤄둔 답장이 있는데, 반가워할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른 부쳐야겠습니다.
더듬이 | 3일 전
의미 있는 행동의 연쇄 반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