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글 (0.3)

더듬이
2025-07-03 18:21
오늘 한나절을 동영상 촬영에 보냈다. 여로모로 유익한 시간이긴 했는데, 그와는 별도로 소통 매체로서 동영상(제작)과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영상 제작은 역시나 번다하고 시간과 인력(이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영상과 음향의 완성도를 위해 사람이 맞춰야 했다. 내용이 기술의 필요에 의해 조정되거나 심지어 단순화되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글은 혼자서 얼마든지 (물론 쓰는 사람의 숙련도에 달려 있지만) 자기 생각을 편하게(생각에 훈련만 돼 있으면 술술) 써내려 가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단순하고 쉽고 편리한가.
지금도 한나절 동안의 일을 이렇게 순식간에 여백에 기록할 수 있다. 양손의 손가락을 움직여 무슨 익숙한 악기를 연주하듯 전광석화 같은 타이핑으로 내용을 복기해 담을 수 있지 않은가. (영상은 수용자의 감각에 대한 자극을 극대화하기에 다중을 사로잡기에 좋다. 반면 글은 감각의 억제와 생각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럴 수 있는 여가와 훈련된 능력을 갖춘 소수에게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
더우기, 글쓰기가 쉽고 편리하다는 말은 그만큼 생각 이외 부차적인 활동에 에너지를 뺏기지 않고 생각 자체에만 더 집중할 수 있고 그 생각을 가장 해상도 높게, 누구나(문해력을 가진 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기호로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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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거의 모든 사람이 저마다 손안의 화면에 기울이는 저 (몰아지경의) 고도의 집중력으로 세상 어느 것을 저만의 시선으로 또 감각으로 살펴본다면... 그 눈으로 도처에 산재한 진선미들을 찾아본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저만의 문체나 화법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지금 소수 인플루언서(개인이나 집단이나 미디어)들의 영향력 경쟁을 위한 과시용 컨텐츠에 시선을 뺏기고 있을 게 아니라.
본래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기술은 다양성의 나눔과 연결을 꿈꿨다. 그러나 소수 플랫폼들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알고리즘으로 지금의 꼴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사용하더라도 그 점을 의식하고 수동적으로 소비할 게 아니라 저항하듯 내 방식대로 사용하기를 고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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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인문대학 교수가 최근 AI 바람에 휩싸인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을 만나 듣고 보고 쓴 을 읽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 방식대로 소화해 재구성했다. 대학생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I 사용이 삽시간에 퍼진 걸 보며 대학 교육의 목적을 되묻게 된다. 과거에 대학 진학을 택할 땐 주어진 특정 과제를 수행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했다. 규칙을 따른다는 조건의 충족 인증으로 학위를 받았다. 전공 불문하고 어려운 일을 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학습 자체를 소중히 여기게 될 수도 있었다. AI 등장으로 이 과정과 어려움을 완전히 건너뛸 수 있게 됐다.
글쓰기가 왜 중요한가. 쓰는 과정과 방식이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머리속에서 텍스트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처리한다. 모두가 동일한 AI 도움을 받는 미래엔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문장 작성 능력이 더 중요해질 수 있다.
AI를 사용하는 학생 대다수는 비슷한 경로를 걷는다: 처음엔 자기 생각 정리 도구로 사용하던 것에서 결국 점차 모든 생각을 AI에 맡기는 단계로 간다. 일부에겐 이제 소셜미디어 같은 게 되었고, 화면 한쪽에 항상 열려 있는 주의분산의 통로로 기능한다. 생각의 과정을 외주화하며 자신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는다.
AI 이용한 부정행위를 두고 말이 많지만 학생만 탓할 순 없다. 그들이 초등학교 시절 노트북 도입을 요구했던가. 팬데믹 기간 화상수업을 요구했던가. AI 개발도 기술 혁신 홍보도 그들이 한 것 아니다. 그들은 얼리어뎁터였고 주어진 체제에서 앞서려 했을 뿐이다. 그들은 비판적 사고와 느린 숙고보다 빠른 결정과 속도가 더 중시되는 시대에 나고 자랐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통제권이 없다. 무력감은 어른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느낄지 모른다. 한 순간엔 코딩이 대세라고 했다가, 다음 순간엔 영어나 철학 전공에서나 배울 수 있는 ‘소프트 스킬’이 중요하다고 한다. 내가 본 많은 학생들은 어떻게든 열심이다. 노력의 적잖은 부분이 불필요한 곳에 허비될 뿐.
교육, 특히 인문학 분야는 실용적인 지식 습득 외에도, 우연히 들은 어떤 복잡한 개념이 학생의 마음에 뿌리 내리고 나중에 꽃피울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AI는 누구나 무엇이든 전문가인양 느낄 수 있게 하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의심과 위험, 실패의 감수다. 대학은 자신의 글을 누군가가 책임 있게 읽어주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러니 진심을 다해 자기 생각을 써보라.
교수들은 강의를 다시 짤 순 있지만 통제력에 한계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AI 제한하려 했던 많은 대학들이 4년 전까지도 없었던 제품을 학교 미래에 필수라며 기업들과 협력 서두르는 걸 보라.
정말 걱정인 것은 챗GPT보다 젊은 세대가 직면한 더 포괄적인 환경 조건의 추세다. 점점 더 내향적으로 변해가는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두며 청소년기 특유의 어색함을 극복하는 연습을 할 기회도 의향도 잃어간다. AI는 조건 악화의 요인일 수 있지만 유일 원인은 아니다. 누적돼온 조건의 정점일 뿐.
이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더 이상 학생들과 '장인 정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디 너의 진실된 목소리를 들려줄 만큼 나를 존중해 줄 수 있겠니. 그 생각이 대단찮아도 좋아. 다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의 너를 만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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