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운동선수들은 요즘처럼 폭염 때문에 옥외 훈련을 할 수 없으면 실내에서 대체 훈련을 한다.
웨이트 같은 것으로 기초체력을 다질 수도 있겠고, 실내에 마련된 맞춤 훈련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집중해서 연습할 수도 있다.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일 때, 가령 이동 중이라거나 시합이 임박해서 부상이나 체력 소모를 피해야 할 때는 마지막 훈련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걸 한다. 말 그대로 머릿속에 경기 상황을 그려보고 자신의 동작을 모의로 예행 연습해 보는 거다. 그런 대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요즘 쏟아지는 뇌과학 책을 보면 이런 류의 설명이 사례로 종종 등장한다. 자신이 직접 몸으로 행동하지 않고 남이 하는 것을 본다든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해당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등등.
이때도 중요한 것은 마인드 컨트롤, 집중력이다.
요즘처럼 더울 때면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아니라 이미지 바캉스, 이미지 투어를 즐기곤 한다. 내가 가봤던 갖가지 시원한 곳들을 되는 대로 떠올려 보는 것이다. 눈보라 치던 설원, 꽁꽁 얼어붙은 빙판으로 변해 있던 호수, 거센 파도가 배를 삼킬 듯 넘실대던 바다,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치고 산호초가 펼쳐져 있던 해저, 급기야 손발이 얼어붙고 추워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던 한겨울의 전방 초소에 이르면 더위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래 봐야 당장의 찬물 샤워만은 못하지만.
나는 정신 승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심신이원론은 분명 빗나간 이분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통념의 어법에 기대어 말하자면, 내 정신이 자신의 딱한 몸을 돌보고 추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힘들 때 든든한 보양식이나 소울 푸드로 마음을, 정신을 북돋울 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몸이 지치고 힘들고 약해질 때는 상상의 힘에 기댄다.
그럴 때 나를 사랑했던(하는), 내가 사랑했던(하는) 사람들이 종종 내 곁으로 불려 온다. (어디선가 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그들이 번번이 나를 구하러 온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치 체홉의 단편 <마차에서>의 주인공 마리야가 어느 순간 추억 속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세상이 다시 환해지는 것과 같다.
영화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힘겹고 어두울 때가 많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이 앞길을 밝히고 그 빛으로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한 곳이 되어주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도전이자 모험인 예술이, 글의 예술인 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도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그저 마음의 위로에만 그친다면 알콜이나 약물에 기대어 현실을 잠시 잊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진짜 구원은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용기와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이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의 문제다.
웨이트 같은 것으로 기초체력을 다질 수도 있겠고, 실내에 마련된 맞춤 훈련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집중해서 연습할 수도 있다.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일 때, 가령 이동 중이라거나 시합이 임박해서 부상이나 체력 소모를 피해야 할 때는 마지막 훈련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걸 한다. 말 그대로 머릿속에 경기 상황을 그려보고 자신의 동작을 모의로 예행 연습해 보는 거다. 그런 대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요즘 쏟아지는 뇌과학 책을 보면 이런 류의 설명이 사례로 종종 등장한다. 자신이 직접 몸으로 행동하지 않고 남이 하는 것을 본다든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해당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등등.
이때도 중요한 것은 마인드 컨트롤, 집중력이다.
요즘처럼 더울 때면 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아니라 이미지 바캉스, 이미지 투어를 즐기곤 한다. 내가 가봤던 갖가지 시원한 곳들을 되는 대로 떠올려 보는 것이다. 눈보라 치던 설원, 꽁꽁 얼어붙은 빙판으로 변해 있던 호수, 거센 파도가 배를 삼킬 듯 넘실대던 바다,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치고 산호초가 펼쳐져 있던 해저, 급기야 손발이 얼어붙고 추워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던 한겨울의 전방 초소에 이르면 더위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래 봐야 당장의 찬물 샤워만은 못하지만.
나는 정신 승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심신이원론은 분명 빗나간 이분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통념의 어법에 기대어 말하자면, 내 정신이 자신의 딱한 몸을 돌보고 추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힘들 때 든든한 보양식이나 소울 푸드로 마음을, 정신을 북돋울 때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몸이 지치고 힘들고 약해질 때는 상상의 힘에 기댄다.
그럴 때 나를 사랑했던(하는), 내가 사랑했던(하는) 사람들이 종종 내 곁으로 불려 온다. (어디선가 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그들이 번번이 나를 구하러 온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치 체홉의 단편 <마차에서>의 주인공 마리야가 어느 순간 추억 속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세상이 다시 환해지는 것과 같다.
영화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힘겹고 어두울 때가 많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빛이 앞길을 밝히고 그 빛으로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한 곳이 되어주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도전이자 모험인 예술이, 글의 예술인 문학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도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그저 마음의 위로에만 그친다면 알콜이나 약물에 기대어 현실을 잠시 잊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진짜 구원은 현실을 다시 마주하고 용기와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이며,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