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인간

고요한
2025-08-09 22:23
단층 촬영기로 파악되는 게 인간의 본질은 아니다. 물리적 성분이나 생물학적 회로만 봐서는 인간성이란 포착되지 않는다. 거기에 측량 가능한 가령 키나 무게, 근육량과 골밀도, 지방과 단백질 함양 같은 것의 수치는 나와도, 지혜 용기 자제력 신의 성실 겸허 공감력 같은 건 알 수 없다. 인간을 이해할 때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인류는 글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고 공유함으로써 마음의 눈에 보이게 했다. 의미와 가치의 세계다. 인간의 삶은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말을 배운 후 오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글쓰기와 읽기를 배우고 (되도록 깊은) 문해력을 기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인간은 삶의 지평인 시간 속에서 펼쳐짐으로써 그가 어떤 존재인지, 이른바 정체가 드러난다. 다시 말해 개인이든 집단이든 서사를 통해 드러난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함으로써 무언가 되려는 노력을 통해 무언가로 되어가는 존재다. 자신을 스스로 (또 더불어) 형성해가는 존재다. 개인이든 인류든 지나온 이력(역사)를 봤을 때 그를 알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자어 文의 어원은 무늬에서 왔다고 한다. 실을 교차시켜 피륙을 짜는 것처럼, 글로 짜나간 것이 문명이고 바로 인간 자신이다. 푸코는 인간을 해변의 모래사장의 무늬 같은 것이라고 했다. 모래는 그 자체로는 응집력도 가소성도 없다. 기억만으로는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나갈 수밖에 없었늘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문자와 글로 시간의 파도에 씻겨 나가지도 마모되지도 않을 이야기를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역시 나는, 우리는 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짜기, 다시 말해 자신의 형상 빚기에 참여하고 있다.

거기에 지금 기계가 개입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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