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바깥에 표시한 것이 글이다. 그렇게들 생각한다.
사실은 문자의 기원은 말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물품을 표시하거나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 사용한 표기가 문자의 기원인 것으로 지금은 알려져 있다. 그런 물표가 기호와 신호로 발전했고 그것이 어떤 의사를 표시하는 용도로 나아갔고, 급기야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정확히 글(특히 표음문자, 알파벳이나 한글 같은 글자에 힘입어)로 옮기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로는 글을 배울 때 말을 글과 연결시켜 익힌다. 그래서 글은 곧 말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지금도 우리는 흔히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많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글을 쓰면서 생각할 때가 많다. (더 많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처음 운을 떼는 거야 생각에서 실마리가 나오겠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생각이 따라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어느 땐 헷갈린다. 머리가 생각을 하는 것을 손이 받아 쓰는 건지, 손끝의 자판을 두드려 나가면서 머리가 따라 생각을 해 나가는 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충 글을 쓰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생각을 고치고 다듬을 때가 많다. 초고의 역할이 그것이다. 마치 밑그림을 그리듯 처음의 어렴풋하거나 성긴 생각을 글로 먼저 풀어놓고서는 다시 돌아와 고쳐 쓰면서 점점 명확히 그리고 정확히 써 나가는 때가 많다. 대개 그런 수순을 취할 때가 대부분이다. 마치 크로키로 얼른 대상의 윤곽선부터 그려 놓고 다시 세부 정밀 묘사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사실은 문자의 기원은 말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물품을 표시하거나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 사용한 표기가 문자의 기원인 것으로 지금은 알려져 있다. 그런 물표가 기호와 신호로 발전했고 그것이 어떤 의사를 표시하는 용도로 나아갔고, 급기야 말을 소리나는 대로 정확히 글(특히 표음문자, 알파벳이나 한글 같은 글자에 힘입어)로 옮기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로는 글을 배울 때 말을 글과 연결시켜 익힌다. 그래서 글은 곧 말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지금도 우리는 흔히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때도 있다. (많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글을 쓰면서 생각할 때가 많다. (더 많은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처음 운을 떼는 거야 생각에서 실마리가 나오겠지만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생각이 따라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어느 땐 헷갈린다. 머리가 생각을 하는 것을 손이 받아 쓰는 건지, 손끝의 자판을 두드려 나가면서 머리가 따라 생각을 해 나가는 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충 글을 쓰고 난 후에 우리는 다시 생각을 고치고 다듬을 때가 많다. 초고의 역할이 그것이다. 마치 밑그림을 그리듯 처음의 어렴풋하거나 성긴 생각을 글로 먼저 풀어놓고서는 다시 돌아와 고쳐 쓰면서 점점 명확히 그리고 정확히 써 나가는 때가 많다. 대개 그런 수순을 취할 때가 대부분이다. 마치 크로키로 얼른 대상의 윤곽선부터 그려 놓고 다시 세부 정밀 묘사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물론 글을 쓰기 전에 가만히 생각에 잠기거나 산책을 하며 심사숙고한 끝에 머릿속에서 어지간히 정리가 된 생각을 한번에 글로 쏟아놓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생각에 훨씬 오래 시간을 들이고 정작 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과거 천재 작가들이 어떤 영감이 떠올랐을 때나, 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오래 숙성시킨 끝에 글로 옮기는 작업이 그랬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는 속기사에게 불러줘서 글을 받아 쓰게(타이핑을 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 번뜩이거나 광풍이 몰아치듯 밀려드는 생각을 글로 옮기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해 혼자만 간신히 알아보는 흘림체나 약어로 휘갈길 때도 있다. 니체는 미친 듯 쏟아지는 생각을 쓰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특수 타자기를 개발했다고도 하지 않던가.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초안을 글로 써두고 생각을 키워가는 것이 맞는다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나는 생각하기 위해 쓴다." 언뜻 조앤 디디온이 떠오르는데 사실 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는 말도 비슷한 계열이다.
종이 위(컴퓨터 화면 위)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생각한다는 말은 내 경우에도 꽤 맞는 말이다. 생각을 글로 ‘보면서’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산책을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떠올리고 정리할 때도 많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할 땐 좀 더 명확하고 논리정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진행되는 방향이 분명하고 사고의 순서도 선형적이다. (이건 월터 옹이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에서 문자 사용이 인간의 사고에 미친 영향으로 거명한 것이기도 하다)
종이 위(컴퓨터 화면 위)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 생각한다는 말은 내 경우에도 꽤 맞는 말이다. 생각을 글로 ‘보면서’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산책을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떠올리고 정리할 때도 많지만, 글을 쓰면서 생각할 땐 좀 더 명확하고 논리정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진행되는 방향이 분명하고 사고의 순서도 선형적이다. (이건 월터 옹이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에서 문자 사용이 인간의 사고에 미친 영향으로 거명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종이와 펜 혹은 화면과 자판을 생각의 긴밀한 협력자로 본다면, 한 발 더 나아가, 챗GPT 사용을 그 연장선 상에서 증강판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아이디어나 단상을 불러주고 그에 맞는 문장을 주문한 후 제시된 것 중에서 고르거나 첨삭하고 다듬어 간다. 그리고 이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식으로 글을 만들어 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종이 위에 글을 쓰고 봐가면서 생각을 발전시켜가는 것이랑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챗GPT는 글쓰기의 좋은 협력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챗GPT의 제안을 평가하고 선별하고 첨삭하고 다듬어 갈 만한 능력이 사용자에게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챗GPT의 제안은 그에게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고, 진위 식별은 물론이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분별도 사실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럴 때는 속수무책으로 그 제안에 따라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AI를 교육 과정에 섣불리 적용하려는 시도는 우려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온갖 말들을 해도 핵심은 이것이다. 아무리 과학 스포츠를 얘기해도 결국 체력 단련과 기량 향상을 위해서는 손수 역기를 반복해서 들고, 공을 다양하게 차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달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봐서 역량을 조금씩 키워 가는 게 기본이다. 올림픽 메달을 두고 어느 나라 어떤 선수나 지옥 훈련을 자처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챗GPT의 제안을 평가하고 선별하고 첨삭하고 다듬어 갈 만한 능력이 사용자에게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챗GPT의 제안은 그에게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일 것이고, 진위 식별은 물론이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분별도 사실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럴 때는 속수무책으로 그 제안에 따라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AI를 교육 과정에 섣불리 적용하려는 시도는 우려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온갖 말들을 해도 핵심은 이것이다. 아무리 과학 스포츠를 얘기해도 결국 체력 단련과 기량 향상을 위해서는 손수 역기를 반복해서 들고, 공을 다양하게 차 보고, 할 수 있는 데까지 달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봐서 역량을 조금씩 키워 가는 게 기본이다. 올림픽 메달을 두고 어느 나라 어떤 선수나 지옥 훈련을 자처하는 것과 같다.)
결국 글의 주도권 행사의 문제다.
협력자로 활용하는 것은 좋다. 문제는 협력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협력이 의존으로 기울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유능한 인간 조수나 비서를 사용할 때와 같다. 처음엔 협력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일의 부담 비율이 상대에게로 넘어가다 보면, 혼자서 처리하려는 노력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이건 우리 몸이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이려는 경향(요컨대 게으름), 즉 되도록 뇌도 고민을 피하려는 경향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필연적이다) 독자적인 돌파력과 자기만의 창의력을 점점 잃어가게 될 수 있다.
어찌 됐든 그럴듯한 결과물을 최대한 빠르게 많이 제출하는 게 목표라면 챗GPT 협력이 무방하고 너무나 반길 만하겠지만, 자신의 생각과 표현 능력의 유지와 발전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오늘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사람들이 AI를 사용하는 21가지 방법' 링크
협력자로 활용하는 것은 좋다. 문제는 협력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협력이 의존으로 기울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유능한 인간 조수나 비서를 사용할 때와 같다. 처음엔 협력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일의 부담 비율이 상대에게로 넘어가다 보면, 혼자서 처리하려는 노력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이건 우리 몸이 에너지 소모를 최대한 줄이려는 경향(요컨대 게으름), 즉 되도록 뇌도 고민을 피하려는 경향을 지녔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필연적이다) 독자적인 돌파력과 자기만의 창의력을 점점 잃어가게 될 수 있다.
어찌 됐든 그럴듯한 결과물을 최대한 빠르게 많이 제출하는 게 목표라면 챗GPT 협력이 무방하고 너무나 반길 만하겠지만, 자신의 생각과 표현 능력의 유지와 발전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오늘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 '사람들이 AI를 사용하는 21가지 방법'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