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의 문화

더듬이
2025-03-31 09:53

오늘 아침 동네 산책길에서 한 외국인 여성과 마주쳤다. 검은 머리에 눈썹도 짙은 라틴계의 젊은 여성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먼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미소로 화답했다.
몇 달 전 외국인 청년을 비슷한 구간에서 만났을 때도 서로 오간 행동이 비슷했다. 금발에 피부가 하얀 그가 먼저 내게 미소를 지었고 나도 눈인사로 화답했다. 문득 말을 걸어 보려다가 이른 아침 혼자만의 호젓한 산책을 방해하는 게 될까 봐 그냥 지나왔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특히 서양의) 외국인들은 확실히 낯선 사람과 마주쳤을 때 미소를 짓는 게 몸에 밴 문화인 것 같다. 일찍부터 대륙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이동이나 이주가 많았고 여러 인종과 민족이 섞여 살다 보니 그런 인사 문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인이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남녀처럼 매번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아니다. 같은 산책길을 지나 산 정상에 있는 헬스장에 가끔씩 운동을 하러 오는 중년 외국인 남성의 경우엔 여러 차례 봐서 서로 낯이 익은데도 아직까지도 먼저 인사는커녕 내가 인사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눈길을 피하는 눈치다. 어쩌면 한국에 와서 우리 문화에 이미 적응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애석한 일이다. 내 생각엔 별로 권할 만하지 않은 문화에 물이 든 셈이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모르는 사이에 눈길이 마주쳐 먼저 미소라도 지으면 생뚱맞게 여기거나 좀 실없는 사람 보듯 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상대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러지, 하고 속으로 궁금해 할 것 같다. (아닌가? 사람따라 다르까?) 그런 어색한 상황을 자초하기보다 피하거나 차단하는 손쉬운 방법이 무표정이다. 얼굴 근육(과 함께 관련 뇌회로)도 쓰지 않는 쪽은 퇴화되기 마련일 것이다. 무표정으로 지내다 보면 표정도 생기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요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유력자들 얼굴을 보며 어쩌다 표정이 저 지경이 됐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가 그랬더라. 인간이 악을 행할 때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간힘을 써야 하고 표정도 덩달아 험악하게 구겨지는 그러고. 아기를 비롯해 동물의 새끼들의 하나같이 얼굴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도 그래야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진화생물학의 설명도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나.
기분이 좋을 때 웃게 되지만, 일부러 웃으면 기분도 덩달아 조금은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라는 실험 결과도 있다. 반대로 울상을 지을 때의 효과도 마찬가지라고 하고. 직접 해 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좋다. 다른 건 다 관두고라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대부분이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365일 거의 언제나 무표정으로 지나치는 사회와, 잠시 스치는 순간이라도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사회, 둘 중 어느 쪽이 더 살 만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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