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공간, 일상의 속도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7-16 16:50
몽테뉴는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현실 행정에 참여하면서 반성적 생각을 끊임없이 한 드문 인간인 것 같습니다... 조금 찾아보았는데, 그의 수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를 낭비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지만, 제대로 된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 살지 않았다는 말인가?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이요, 빛나는 일인데 무슨 다른 것을 원하는가?"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책 쓰고, 싸움에 이기고, 영지를 넓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을 가다듬고 행동에 정온함을 얻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책무다.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빛나는 걸작품이다." 사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무슨 외적인 업적이 중요하겠어요? 이런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몽테뉴는 지혜의 인간이지요. 그렇다는 것은 그가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사는 방법에 대하여, 자기 돌보는 방법에 대하여 생각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동양 전통에서도 현자는 사는 법, 처세, 처신법, 바른 사회와 정치, 이런 것을 이야기한 사람들이지요. 사실 우리의 선현들도 그런 것을 적으면서 살았지요.
---
철학적 반성도 그렇고, 이 내면 공간으로의 회귀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날카롭게 인식하고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너그럽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도취적인 삶을 살다 보면, 또 너무 행동적인 것만 강조하다 보면, 그런 공간이 점점 축소되지요... 마음의 공간은 목전의 사안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요. 이 거리 속에서 이해관계를 넘어선, 세상의 너그러움에 대한 느낌이 일어날 수 있지요... 이 내면 공간의 작용은 외면 공간이 적절한 데서 더 잘 이루어지지요. 시끄러운 장바닥에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
실러를 읽는다, 다산을 읽는다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작가들을 우리 삶의 거울로 읽는 것이지요. 우리가 읽는 모든 문화적 유산은 내 삶을 위한 하나의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 사례 자체가 직접적으로 나한테 적용되는 게 아니라 그 사례를 내 주체성 속에서 선택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내 삶의 일부가 되는 거지요.
---
속도를 느리게 한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순간을 관조적으로 알면서 넘어간다는 것, 의식 속에 기록하면서 넘어간다는 뜻이에요. 그 때문에 속도를 느리게 한다는 것 자체가 관조가 되지요. 삶의 모든 양식에 있어 관조적 느림이 필요해요. 심미적 행위의 의미의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
어디 가서 얘기하느라고 독일 헌법을 조사했는데, 그 헌법에 '후대를 위해서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동물을 보존하는 걸 정부 책임으로 한다.'라는 규정이 있더군요... 우리도 그런 헌법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본법이라고 해서 독일 헌법 제20조 제항에 나와요. 제 1항은 "독일은 민주사회연방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지요. Demokratische und Soziale Bundesrepublick이라는 걸, Sozialstaat로 줄여서 말하지요. 그걸 확인하다 보니, 바로 그다음 구절에 자연환경의 보존을 정부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것이 나와 있었습니다.

(문광훈: 'sozial, social'의 의미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안위를 고려한'이라는 뜻이니까요.)

헌법 안에는 그 구체적 내용이 잘 규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래서 인터넷에 나온 독일의 <정치학 사전>이란 걸 찾아보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오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국가 형태"를 사회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자본주의 체제를 가지면서도 거기서 나오는 사회 문제를 방치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해결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규정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우창, 문광훈의 대화 <세 개의 동그라미: 마음, 이데아, 자각> 중에서, 김우창의 말
목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