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용기

더듬이
2025-04-14 07:15

이야기에는 현실을 굽히는 힘이 있다는 오랜 가르침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선물>을 옮기고 나서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이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하고 난 뒤 어느 분이 이 문장을 다시 상기시켜 줬다. 그 믿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읽고 또 쓴다.

이야기에 현실을 굽히는 힘이 있다면, 이름(호명)에는 대상을 규정하는 힘이 있다. 눈속에서 피어난 꽃을 바라보던 아이가 말했다. "이 꽃 참 용감해."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엄마는 감동했다.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식물을 관찰할 줄 알고, 꽃의 모습을 두고 '용감하다'는 말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더없이 대견했다. 아이는 자신이 이해하고 기억한 '용감하다'라는 단어를 자신이 마주한 대상/세상에 그런 식으로 적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아이는 단어를 응용하고 확장하는 법을 알았다. 어릴 때는 누구나 시인이다. 배운 것에 이미 닳도록 익숙해져 버린 어른처럼 말의 감각에 상투적이지 않다. 아이가 발화하던 그 순간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한 엄마의 표정을 보며 그 이야기를 듣는 나도(모두가) 감동했다. 이제 나 역시 활짝 핀 꽃을 보면서 용기를 떠올릴 것이다.

주말 사이에 비와 강풍이 닥쳤다. 꽃들이 다 져 버리고 말았을 줄 알았다. 아침에 산에 올라 보니 꽃들이 꿋꿋이 피어 있다. 오히려 비를 머금고 더 싱그럽게 피어난 새 꽃송이들도 보인다. 아마 개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정도의 비바람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을 가졌던 것일 테다. 그렇더라도 아이의 말처럼 나는 꽃의 '용기'가 비바람을 이겨낸 것이라 믿는다.
이야기에는 현실을 굽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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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레오나르도컬러풀이오 | 1개월 전

기발하고 생생한 표현으로 삶을 가꾸기 위해 가끔은 아이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용기'의 근원이 되어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더듬이 | 1개월 전

용기도 에너지일 텐데, 모든 에너지는 생생함에서 오는 것 같아요. 생명은 생명을 서로 자극하고 북돋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생기 있는 것들을 늘 가까이 해야 해요. 내가 생기를 잃었거나 약해졌을 때는 더더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