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혹은 무엇

더듬이
2025-05-02 07:41

"넌 또 뭐야?
조폭 영화 같은 데서 종종 등장하는 대사다. 맨앞의 '너'라는 인칭대명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에 따라붙은 '뭐야'라는 의문대명사는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대를 내 앞길을 막는 방해물로 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반면,
"당신은 누구세요?"
이런 질문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로맨스물에 나올 법한 대사다.
무엇과 누구. What과 Who.
전자는 사물에, 후자는 사람(인격체)에게 쓰는 의문대명사다. 모든 언어에는 인칭대명사가 있고 사물과 사람을 구분한다. 둘은 뭐가 다를까.
'무엇'이라고 할 때에는 대개 그것의 형태나 성분, 용도, 쓸모를 묻는다. ‘누구'인지를 물을 때에는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그의 키나 몸무게, 피부나 머리 색, 지능, 눈이나 발의 크기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 말이다. 그 사람의 됨됨이 말이다. (됨becoming이 두 번 반복된다는 점에 유의하라. 인품이란 고정불변하거나 단정하거나 확정된 being이 아니란 말이다.)
입학이나 입사 면접 때 묻는 내용을 떠올리면 쉽다. 그럴 때는 대개 '이력서'로 답한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어떤 생각이나 가치관, 장래 계획이나 포부 같은 것을 추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럴 때도 지원자를 어떤 용품이나 도구로 볼 때는 ‘누구’가 아닌 ‘무엇‘의 관점으로 볼 것이고, 지원자도 그에 맞춰 답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스펙 나열에 주력할 것이다.)

MBTI가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대화 중에 서로 그걸로 이야기하는 것도 자주 본다.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게 상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큰 틀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나는 나의 MBTI를 모른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재미 삼아 하는 건데 뭘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느냐는 듯한 눈빛을 보인다.그런 정도라면 좋다. 하지만 대개는 재미 삼아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고 우리 인식을 규정짓는다. 비단 MBTI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어떤 범주로 분류하고 단정짓는 것에 대해 나는 거리낌이 있다.

내 혈액형은 A다. 어릴 때 학교에서부터 건강기록부에 기재되어 있었고, 알 수밖에 없었다. 만일의 경우 혈액은 생사를 가를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본인이나 가족은 혈액을 알고 있는 게 좋다. 사람을 생명체로 보고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하려는 의학에서 그 필요에 따라 대상화하는 것은 인정할 만하다.
문제는 그 혈액형으로 성격까지 구분할 때다. 가령, A형은 흔히 소심형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O형은 외향형으로 통한다. 나름 근거가 있을 것이고 적잖이 설명력도 있는 것 같다.
문제는 그런 것이 알게 모르게, 사람을 어떤 식으로 단정짓거나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경향이다.
가령 O형은 좀 과하거나 격해도 그러려니 하거나 기정사실화하는 문화다. 남들도 자신도 그렇게 용인한다. 반면 A형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눅 들거나 위축되기 십상이다.
어릴 때 그런 식으로 구분하고 규정당하는 일이 못내 불편했다. 그런 느낌 역시 소심형이나 내성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A형 특유의 반응인가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내 안에는 내성형이라는 부분도 있지만 엄연히 누구 못지 않게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면이 공존했다. 사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다면적이었고 복잡했다. 남들이 혹은 스스로 어떤 유형으로 규정짓는 것이 그렇게 몰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그런 경향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은 대상화했을 때의 지칭어다. 자연과학의 접근법이 규정짓는 방식이다. '누구'는 삶의 주체이자, 대화의 상대로서 볼 때 부르는 말이다. 자연과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한다면, 인문학은 인간이 누구(어떤 존재)인지 묻는다.
'무엇'인지 물었을 때 답은 '그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된다. 그에 반해 '누구'인지 물었을 때 답은 '나로 말할 것 같으면'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내력이 나온다. 그때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그가 살아가고 있고 아직도 살 날이 많다면,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도 미결이고 미완이다.)
자신이 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잘 할 수도 있지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남들이 더 잘 알 수 있고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다. 자신도 자신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해할 수도 있으므로.
 
인간이 무엇인지 안다고 하면서, 인간을(특히 나를, 그리고 구체적인 누군가를) 누구(어떤 존재)인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자를 나는 의심하고 경계한다.
중요한 것은 유일무이한 개별자인 인간으로서 나는 누구이고, 내 앞에 있는 사람, 내 주변의 사람들, 나와 더불어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하고 알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시작점이자 어쩌면 유일할지도 모르는 방법은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다.
오가는 진심 어린 대화 속에서 서로 형성되어 가는 존재가 바로 서로 묻고 답하는 상대, 누구로서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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