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기력
2025-05-08 09:46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운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주변의 것에서 영향을 받고 모방하거나 유의하거나 경계한다. 타고난 학습 본능이다. 사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직접 시행착오를 겪거나 주변의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배운다.
인간의 학습은 보다 의식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학교라는 곳이 따로 있고, 교사가 따로 있고, 전문적인 교육 과정이 따로 있어 일찍부터 집단적으로 가르치고 전수한다.
오늘날 그것은 대개 지적인 방식의 배움이다. 문제는 직접 자신이 몸으로 체험해서 알기보다 지적인(머리로만 배우는) 학습에 과다하게 의존하면서 그쪽으로만 지나치게 순치되고 길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수된 틀(이 역시 기본기로서 중요하다)을 벗어나 새롭게 뭔가 시도해 보고 도전해 보려는 의욕마저 사전에 꺾이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게 병이다"라거나, 한자 사자성어에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그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일찍부터 온갖 정보를 (대개는 눈으로, 머리속으로) 접한다. 적극적으로 찾아서 선별해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듯 밀려 들어오는 정보에 의해 '아는 것'이 많아진다. 끊임없는 정보의 소비자, 탐식가가 된다. 대개는 개인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나 압도하는 성격의 것들이다.
특히 산업자본의 시대에 뒤이은 금융자본의 시대, 과학기술 시대, 디지털 경제 시대에 와서 소수 테크 기업은 일과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하나둘 잠식해 들어가는 반면 일반 다수 개인의 무기력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것이 주도하는 변화의 속도와 규모에 압도되면서 자신은 점점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나 뉴스를 알면 알수록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하거나 극히 사소해 보이고,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별 효과도 없을 것 같다는 섣부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무기력을 야기하는 '학습'의 큰 범주 중에는 과학도 들어간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인과관계에 의한 결정론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자연 과학이 대표적이다. 모든 것(대상화하거나 그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을 대상화하고 수식화해서 측정하고 계량하고 인과관계로 설명해 낸다. 문제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 특히 인간에게도 그런 접근법을 적용해 인간 활동, 나아가 삶을 물리화학적 작용으로 환원해 설명해 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면 내 삶에서 '내'가 결정하는 게 있을까?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인 게 맞을까?
대니얼 데닛 같은 신경-철학자는 자아나 자유의지는 '유용한 환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지금 여기서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도 우주의 먼지'라는 말에 담긴 겸허함를 높이 사면서도, 그것이 자칫 사람들에게 허무주의나 찰나주의를 안기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런 결정론과 환원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을 읽었다. 자유의지 문제에 관한 책은 찬반 양쪽이나 절충적인 입장에서 나온 책들이 많지만, 이 책은 진화론에 입각하면서도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아주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은 주체성의 시작이고 그 끝점에 인간의 정신(신경회로)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잘 살려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니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걸 한 권의 단행본으로 치밀하게 논증했다. 지금 필요한 책이다. 번역되면 좋겠다.
사실 주체성의 문제는 인문학이 줄곧 이야기해 온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라는 것. 그 주체란 주변의 모든 것들과 엮여 있다는 것. 그것들을 잘 살피고, 무엇보다 자신을 잘 살피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오도된 정보에 눌려 의기소침해 있던 나의 주체성, 인간 주체성에 다시 주목하고 되살리고 북돋워야 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배운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주변의 것에서 영향을 받고 모방하거나 유의하거나 경계한다. 타고난 학습 본능이다. 사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직접 시행착오를 겪거나 주변의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배운다.
인간의 학습은 보다 의식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학교라는 곳이 따로 있고, 교사가 따로 있고, 전문적인 교육 과정이 따로 있어 일찍부터 집단적으로 가르치고 전수한다.
오늘날 그것은 대개 지적인 방식의 배움이다. 문제는 직접 자신이 몸으로 체험해서 알기보다 지적인(머리로만 배우는) 학습에 과다하게 의존하면서 그쪽으로만 지나치게 순치되고 길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수된 틀(이 역시 기본기로서 중요하다)을 벗어나 새롭게 뭔가 시도해 보고 도전해 보려는 의욕마저 사전에 꺾이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게 병이다"라거나, 한자 사자성어에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그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일찍부터 온갖 정보를 (대개는 눈으로, 머리속으로) 접한다. 적극적으로 찾아서 선별해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듯 밀려 들어오는 정보에 의해 '아는 것'이 많아진다. 끊임없는 정보의 소비자, 탐식가가 된다. 대개는 개인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나 압도하는 성격의 것들이다.
특히 산업자본의 시대에 뒤이은 금융자본의 시대, 과학기술 시대, 디지털 경제 시대에 와서 소수 테크 기업은 일과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하나둘 잠식해 들어가는 반면 일반 다수 개인의 무기력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것이 주도하는 변화의 속도와 규모에 압도되면서 자신은 점점 왜소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 같음을 느낀다. 세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나 뉴스를 알면 알수록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하거나 극히 사소해 보이고,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별 효과도 없을 것 같다는 섣부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 무기력을 야기하는 '학습'의 큰 범주 중에는 과학도 들어간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인과관계에 의한 결정론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자연 과학이 대표적이다. 모든 것(대상화하거나 그것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을 대상화하고 수식화해서 측정하고 계량하고 인과관계로 설명해 낸다. 문제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 특히 인간에게도 그런 접근법을 적용해 인간 활동, 나아가 삶을 물리화학적 작용으로 환원해 설명해 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설명하면 내 삶에서 '내'가 결정하는 게 있을까?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인 게 맞을까?
대니얼 데닛 같은 신경-철학자는 자아나 자유의지는 '유용한 환각'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를 지금 여기서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도 우주의 먼지'라는 말에 담긴 겸허함를 높이 사면서도, 그것이 자칫 사람들에게 허무주의나 찰나주의를 안기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런 결정론과 환원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을 읽었다. 자유의지 문제에 관한 책은 찬반 양쪽이나 절충적인 입장에서 나온 책들이 많지만, 이 책은 진화론에 입각하면서도 자유의지를 전면적으로 옹호한다는 점에서 참신하다.
아주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은 주체성의 시작이고 그 끝점에 인간의 정신(신경회로)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잘 살려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너무 당연한 말 아니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걸 한 권의 단행본으로 치밀하게 논증했다. 지금 필요한 책이다. 번역되면 좋겠다.
사실 주체성의 문제는 인문학이 줄곧 이야기해 온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라는 것. 그 주체란 주변의 모든 것들과 엮여 있다는 것. 그것들을 잘 살피고, 무엇보다 자신을 잘 살피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오도된 정보에 눌려 의기소침해 있던 나의 주체성, 인간 주체성에 다시 주목하고 되살리고 북돋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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