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안다는 것>, <두 번째 산>, <인간의 품격> 같은 책으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최근에 쓴 칼럼을 읽었다.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도 공유한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 우리 내면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런 정신 작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오랜 질문에 현대 신경과학은 뭐라고 답하는지 최근 동향을 들어 설명한다.
뇌의 신경망 연결에 따른 우리의 사고 작용을 찌르레기떼의 군무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원래 Aeon에 실린 신경과학자 Luiz Pessoa의 글 The Entangled Brain에서 가져온 비유를 실마리로 글을 이어가는데 잘 썼다. 발췌 번역해 올린다.
원문 David Brooks, What Are We Thinking?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 우리 내면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런 정신 작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오랜 질문에 현대 신경과학은 뭐라고 답하는지 최근 동향을 들어 설명한다.
뇌의 신경망 연결에 따른 우리의 사고 작용을 찌르레기떼의 군무에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원래 Aeon에 실린 신경과학자 Luiz Pessoa의 글 The Entangled Brain에서 가져온 비유를 실마리로 글을 이어가는데 잘 썼다. 발췌 번역해 올린다.
원문 David Brooks, What Are We Thinking?
20년 전만 해도 신경과학자들은 뇌의 어느 부위에서 다양한 기능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 데 치중했다. 대중적으로도 퍼진 답변은 가령, 감정은 편도체에서, 동기는 대뇌측좌핵에서... 이런 식이었다. 강연자들은 뇌 스캔 슬라이드를 곁들인 프레젠테이션으로 인기를 끌었다. “두정엽이 발화하는 걸 보세요. 이게 바로 ~를 증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모듈식 접근법(각 뇌 영역이 고유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설명 방식)에서 벗어나 뇌를 상호 연결된 영역들의 동적 네트워크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신경과학자 Luiz Pessoa는 이를 새들의 군무에 비유한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가창오리떼 군무를 떠올려보면 된다.) 새들의 집단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조화로운 춤이 탄생한다. 그처럼 우리 뇌도 복잡한 문제 상황을 헤쳐 나가려 할 때 여러 뇌 영역이 동시에 함께 발화하면서 마치 찌르레기 떼의 군무에서 보는 것 같은 하나의 패턴을 형성한다.
그럴 것 같다. 삶은 정말 복잡하다. 그 수백 수천 만 가지 변수들의 조합에 의한 예상치 못한 상황을 처리하려면, 몇몇 영역이 몇 가지 역할만 수행하는 뇌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주의 은하계에 비유할 만큼) 방대한 네트워크화된 집합체를 즉흥적으로 구성해 역동적으로 연대하며 반응을 조율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런 이미지로 학교 교실을 본다. 각각의 학생들을 한 무리의 찌르레기로 상상해 보라. 이들의 뇌는 정보를 채워 넣을 빈 그릇이 아니다. 무미건조하게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도 아니다. 각각의 학생은 저마다 생각은 물론 감정과 욕망, 충동, 기억, 신체 감각 등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소용돌이치는 존재다. 이 모든 것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마음을 형성하고, 그 마음이 학생으로 하여금 하루하루의 사건들을 헤쳐나가도록 이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눈에 크게 띄는 것은 개인 간의 차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야 할 통으로 보거나 뇌를 일종의 컴퓨터로 간주한다면, 모든 통과 컴퓨터는 엇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아이들을 소용돌이로 본다면, 각 소용돌이는 고유한 움직임의 패턴, 독자적인 성격, 독특한 춤사위를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표준화'되어 있다. 토드 로즈가 저서 『평균의 종말』에서 지적했듯이, 사람을 평가하거나 분류할 때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측정하고 단일 연속체에 따라 순위를 매긴다. 어떤 사람은 A 등급, 어떤 사람은 B, 어떤 사람은 D...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되 더 나아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찌르레기떼의 춤사위로 본다면, 그런 분류 체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공장식 일괄 접근법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단일 척도로 순위를 매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관점의 변화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변화야말로 인간의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이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을 몇 가지 색인표나 특성으로 규정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무리는 항상 움직인다. 집에서는 외향적인 사람이 밖에서는 내향적일 수 있다. 강세장에서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트레이더가 약세장에서는 지나치게 신중해질 수도 있다.
우리의 행동은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렇다if and then'의 패턴에 가깝다. 특정 상황에 직면하면 특정 사고 과정과 행동으로 반응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각 개인을 군무체로 본다면 영원불변한 특성보다 각 개인의 변화와 적응 능력에 더 주목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교훈.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범주(category)들이 오히려 실제 이해를 방해한다. 우리는 정신 활동도 지각, 이성, 감정, 욕구, 행동 같은 범주로 나눈다. 그러나 인간을 소용돌이치는 하나의 집합체로 본다면, 이 모든 다양한 정신 활동도 하나의 전체론적 과정의 일부로서 강렬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보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보는 것은 다시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 과정에서 범주들 사이의 경계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이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지적했듯이, "감정은 원칙적으로 인지나 지각과 별개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돼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오랜 비유에 따르면, 이성은 마차의 몰이꾼이고, 정열(감정과 욕망)은 마차를 끄는 말들이다. 이 우화에서 이성은 차분하고 현명한 인간인 반면, 감정과 욕망은 멍청하고 원시적인 짐승들이다. 이성으로 정열을 억누르고 통제할 때 선한 이성적 삶을 산다.
이 비유는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정열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본다. 사실 감정은 원시적이고 어리석지만은 않다. 긍정적인 감정은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경외감은 좁은 자기 중심을 넘어 시야를 넓히게 한다. 슬픔은 사고 방식을 바꾸도록 이끌기도 한다.
욕망 또한 무지하지 않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신체 역시 나름의 지혜가 있다. 코르티솔은 경계심을 높이고, 아드레날린은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을 준비시킨다.
애니 머피 폴이 저서 『Extended Mind(확장된 마음)』에서 지적했듯이, "최근 연구는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체가 뇌보다 더 이성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서 마음을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성과 감정, 욕망은 각각 사람들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판단하는 데 활용하는 서로 다른 자원일 뿐이다. 각 능력은 고유의 강점과 약점이 있으며, 우리는 이 모든 능력을 우아한 소용돌이 속에서 조화롭게 조율할 때 삶은 가장 잘 흘러간다.
어떤 사람들은 마부의 비유에 너무 현혹돼 자신이 지닌 잠재적인 능력을 충분히 기르거나 활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높은 '합리적 지능'에 너무 매료돼 자신의 감정과 욕망, 또는 직감이 보내는 신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이 종종 경악할 만큼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러나 인간을 날아다니는 찌르레기떼의 군무로 보는 시각은, 비록 의식적 인식의 수면 아래에서 솟아나올지라도 우리가 매 순간 의지해야 할 그 모든 깊은 과정들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해준다.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를 충분히 인간다울 수 있게 만드는 우리 주관 내면의 깊은 과정들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 더 나은 자신이 되고자 갈망하는 방식,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우리의 인생 순례를 행복하게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잠재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