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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하는 삶 창조하는 삶

고요한 프로필 고요한
2026-01-20 22:01
왜 창조하는 삶이 좋은가
가톨릭 신자이면서 학자이자 작가였던 톨킨의 사고에 기댄 설명인데 종교적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감동적이다.
원문:  Why You Must Create 발췌 번역

소비의 시대다. 모든 화면은 조금만 더 스크롤하도록 유혹하고, 끊임없는 콘텐츠와 분노, 산만함을 쏟아낸다. 소비는 쉽고 편리하지만, 창조는 어렵고 힘들다. 굳이 왜 후자를 택할까.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 R. R. 톨킨은 인간은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톨킨은 1939년 강연 <동화에 관하여>에서 '하위 창조(sub-creation)'라는 말을 처음 창안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에게 신은 곧 진리와 선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창조주였다.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면 인간 역시 창조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라고 봤다.  그에게 창조란 예술, 음악, 문학, 건축 등 어떤 형태로든 신의 질서에 참여하고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창의성은 개인적 표현을 넘어서는 차원의 것이다. 상상력은 목적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이 아니라, 세상과 온전히 교감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하위 창조는 자아 중심이 아니라 순종에 관한 것이다. 창조로의 부름calling에 대한 응답이다. 소홀히 한다면 아름다움을 놓칠 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잃기 시작한다.

톨킨은 단순히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축했다. 그가 생명을 불어넣은 언어, 역사, 계보, 우주론은 모두 일상의 조용한 틈새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교수, 남편, 아버지, 친구로서의 의무 사이를 오가며 작업했다.

당초 그의 신화를 요구하는 출판사도 갈망하는 독자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썼다. 왜? 그가 받은 선물(언어, 이야기꾼의 재능 등)을 혼자 갖고 있어선 안 된다고 믿었다. 그것들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 발전시켜 타인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이었다. 창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닌 소명과 성장의 수단이었다.

현대 문화는 그저 보고 스크롤하고 남의 창작물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진정한 성장은 창조하고 구축할 때 이루어지며,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창조할 때 그 성장은 배가 된다.

원래 <반지의 제왕>은 대중과 공유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었다. 톨킨 자신의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수년에 걸쳐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쳤지만, 명성과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작품을 쓰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여기서 작품의 가치는 조회 수로 정의되는 오늘날의 오해가 드러난다.

자녀를 위해 장난감을 깎는 아버지, 친구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 자신을 위해 일기를 쓰는 십대 모두 그들의 노력으로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한다.

창조의 행위는 영혼을 다듬는다. 완성품으로 이뤄진 성과 때문이 아니라 창조 과정이 요구하는 것-노력, 상상력, 인내, 절제, 그리고 사랑의 수고 때문이다. 톨킨은 동화가 세상에 대한 맑은 시야를 되찾게 하고, 잊었던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고 봤다.

나아가 창조 행위 자체는 더 깊은 일을 한다. 창조하는 사람을 정련한다. 상상력의 근육을 단련시키고,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며,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장애물을 극복하게 만든다. 요컨대 창조의 열매는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당신이 되어가는 모습 그 자체다.

창조자의 삶은 어렵다. 톨킨 자신이 잘 알았다. 창조의 고난과 보상을 둘 다 부각하기 위해 그는 이에 관한 단편 소설을 썼다. 강렬한 우화를 통해 그는 창조자들이 여정에서 마주하는 가장 큰 위협과 이를 극복하는 열쇠를 묘사한다. 1945년 발표한 '니글의 나뭇잎'이라는 단편이 그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그리려는 화가 니글의 소박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가 너무나 완벽하게 그리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나무의 윤곽을 스케치하면서 시작하지만, 곧 한 장의 잎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끝없이 그 잎을 다시 그리고 수정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삶의 의무에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결국 그는 죽고 캔버스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톨킨은 이 이야기가 일종의 자기 고백임을 인정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언어와 지리, 계보를 구축해 왔지만 모든 것을 완성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저주다. 비전을 선명하게 볼수록 그 불완전한 실행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그가 <니글의 나뭇잎>에서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세부 사항에 완벽을 기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 작품은 아무리 개념이 뛰어나더라도 타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신 앞에 놓인 과제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니글은 죽은 후 낯선 땅으로 이송된다. 그곳에서 그는 충격 속에 그 나무를 보게 된다. 진짜 나무를. 캔버스에 담긴 나무가 아니라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나무를. 온전히 완성된 모습으로.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재하는 모습으로.

이것이 고군분투하는 창조자에게 톨킨이 베푸는 은혜다. 니글이 생전에 미완으로 남긴 작품, 불완전하고 결점 많으며 누구도 보지 못한 작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만들려 했던 것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버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완성되었지만,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이뤄졌다.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이어가야 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비록 완성하지 못했더라도, 여전히 당신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은 위안이 된다.

그렇더라도 책임은 남아 있다: 당신이 부름받은 일을 다른 누군가가 완성해 줄 거라 가정하지 마라. 당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으며, 당신은 창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는 것, 나무를 상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잎사귀 하나하나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당신의 나무가 필요하다.

우리는 속이 텅 비어가는 세상, 상상력이 무뎌지고 아름다움이 값싸게 여겨지며 끝없는 소음 속에 의미가 사라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조보다 소비를 선택하고 있다. 그 결과는 명백하다.

그 때문에 창조자로서 당신의 작업이 중요하다. 유명해져서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세상의 작은 구석에서라도.

모든 창조의 행위는 혼돈에 대한 일격이며 공허함을 밀어낸다. 그것은 당신을 성장하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며, 다른 이들에게 세상이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을 엿보게 한다.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을 창조할 때 당신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창조주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된다. 인간의 하위 창조 행위는 일종의 기도이며, 영원한 분과 마음을 맞추며 당신의 정신과 영혼을 정화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열매를 맺는다. 당신의 하위 창조가 어떤 형태의 표현이든, 가정을 꾸리는 것이든, 사업을 키우는 것이든, 소설을 쓰는 것이든, 그것에 쏟는 노력과 사랑은 세상의 회복에 기여한다. 그것은 썩어가는 주변 세계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방법이다.

톨킨의 메시지를 기억하라. 주저하지 마라. 경외심으로 구축하고, 절박함으로 창조하며, 당신이 되어야 할 존재의 충만함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 그 부름에 귀 기울이라. 당신은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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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B동 조교 프로필 B동 조교 | 4일 전
나는 왜 반복해서 톨킨이 그린 중간계로 돌아가는가
(미국의 암울한 상황이 어른거리는 에세이. 하지만 보편적인 울림이 있는 글) 부분 발췌
톨킨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부서져 있기에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다.
『반지의 제왕』을 읽는 경험은 소설을 넘기는 것보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가깝다. 고통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언젠가 치유될 수 있을 거라 상상할 수 있는 세계다.
톨킨은 W. H. 오든에게 핀란드의 『칼레발라』에서 ‘공기 중 뭔가’를 발견했다고 썼다. 자신의 글에 담아내려 했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감정은 『칼레발라』 『베오울프』 같은 북유럽 서사시들이 텍스트적 잔해라는 사실에서 나왔다. 수세기에 걸친 언어적·문화적 변화의 상처들-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부분적으로만 복원된 손상들-이 바로 작품들에 미학적 힘을 부여했다.
『반지의 제왕』 은 톨킨이 1917년 솜 전투에서 감염된 참호열로 요양 중이던 임시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한 방대한 시, 산문 이야기, 준역사적 연대기의 기록들이었다. 이 책을 완성하기 위해 17년간 고된 고통을 겪으며 기울인 노력의 부산물이었다.
톨킨은 이 작품이 마치 발견되어 편집된 것처럼 느껴지도록 의도했다. 책의 틀이 되는 이야기는 일기를 번역한 것이 역사서로 확장되었고 후대 학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는 것이다.
폐허는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지만 그 대가로 상실의 영원함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톨킨은 4살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젊은 가족이 가난에 빠졌다. 어머니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친족들로부터 의절당해 경제 상황은 더 위태해졌다.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는 톨킨이 12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와 남동생은 신부에게 맡겨졌다.
프랑스 전장으로 파병되기 직전,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단 한 명만 살아남을 전쟁을 앞두고, 톨킨은 ‘죽음이 가까웠기에‘ 아름다움의 인식은 강화되었지만 후회로 무거워졌다고 적었다: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손에 넣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슬픔은 톨킨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감정이다. 프로도가 고향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되돌아보며 느끼는 아픔에서 시작되어 책 마지막 문장인 “자, 돌아왔군”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이 문장은 프로도의 변함없는 동반자 샘이 작별할 때 느꼈던 슬픔은 말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
그러나 가슴 아픈 슬픔과 함께 인간 삶에 대한 이 시각에는 위엄이 있다. 탑이 무너진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폐허 속에서도. 깊고 본질적으로 진실된 톨킨의 비전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그 슬픔들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1939년 《반지의 제왕》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톨킨은 ‘동화에 관하여’라는 강연을 통해 판타지문학이 슬픔으로부터의 탈출구이자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유카타스트로피eucatastrophe’라 명명한,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통해.
유카타스트로피의 순간이란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도, 결국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톨킨이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이야기의 그물 자체를 찢고 빛을 비추는, 기쁨과 마음의 소망에 대한 날카로운 찰나의 일별을 얻는’ 그런 세계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창조한 그 세계를. 닭이 울 때 로한의 뿔나팔이 울려 퍼지고, 검은 돛을 단 배에 펼쳐진 깃발에 하얀 나무와 일곱 별이 새겨져 있으며, 간달프가 “사우론의 왕국은 끝났다”고 외치면 정말로 끝나는 그런 세계를.
그와 같은 중간계가 슬픔과 되찾을 수 없는 상실로 가득하고, 작품 자체가 시간과 변화에 닳아빠진 듯 보인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어쩌면 우리 자신의 타락한 삶 속에서도 선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더해준다.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아오르고, 구름더미 위로 한 별이 높이 반짝이며, 우리는 세상의 벽 너머 기쁨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픔이 부재하는 곳이 아닌, 그러나 눈물이 쓰라림 없이 축복받는 곳으로 향하는 길을 본다. 세상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기억 이상의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을 발견한다.
/Michael D.C. Drout, Why I Keep Returning to Middle-Earth, NYT Dec. 19,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