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세탁은 무죄인가
2025-03-21 19:35
작가 김훈은 자기 방 벽에 '日必五'라는 말이 붙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루에 원고지 5장은 반드시 쓴다는 각오를 담은 말이다. 글로 밥과 삶의 의미를 짓는 사람이니 당연한 말이겠다.
인간에게 게으름이란 천성이다. 더구나 반복되는 일은 얼마 가지 않아 지루해 한다.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이든 어떤 관성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계속해서 존재하려 하고, 한번 움직인 것은 (마찰만 없으면) 계속해서 움직이는 상태에 있으려 하고, 한번 멈추면 (다른 충격이 없는 한)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한번 태어난 생명이 어떻게든 가능하면 자기 수명을 늘여 가려는 것도 그런 큰 원리 속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기 정체성도 그런 것에 속한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지속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작가 중에는 실명을 쓰는 사람이 많지만 가명, 필명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처음 데뷔하면서 필명을 지어 글을 쓸 때는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가령 엘레나 페란테 같은 필명을 쓰는 '얼굴 없는' 작가는 실명이 무엇인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조차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활동한다. 꽤 오래 조용한 걸 보면 혹시나 그 사이 사망한 건 아닐까), 필명마저도 여러 개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 실명 말고도 70여 개의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다.
나도 어쩌다 '더듬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해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다시 한 번 바꿔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잠시 생각이 머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는 리어왕의 절규, 누가 봐도 파이프인 그림을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붙인 화가, 당신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든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했던 철학자...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행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할까 생각해 보면 흔쾌히 동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곤 한다. 왜일까.
내 안에 여럿이 웅크리고 있다가 (그런 점에서 다중이다) 어떤 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그게 오로지 나인 듯 행세한다.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상황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대신 고개를 들고 나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보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것도 같고. 이 여럿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서로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은 사상가, 심리학자, 철학자들은 이런 자아의 복수성, 대화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그래서 내면화된 자아라고 이야기한 사회학자도 있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의 자아라는 것도 관념(idea)의 다발일 뿐이라고 했지만, 우리 정신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일하게 고정불변한 것이라기보다 뭔가 혼돈과 질서가 뒤섞인 채 뭉쳤다 쪼개졌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어떤 구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구름이 자칫 완전히 흩어져 버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몸이다. 그렇게 보면 정신은 몸에 깃들어 있는 무엇, 산에 걸린 구름 모자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구름 모자에 가려진, 그 너머의 무엇이 진정한 나일까.
어쨌든 내가 김훈 같은 작가는 아니어도, 그의 '일필오' 비슷한 약속은 이 횡설수설 에세이로 지켰다.
인간에게 게으름이란 천성이다. 더구나 반복되는 일은 얼마 가지 않아 지루해 한다.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이든 어떤 관성이 있다. 존재하는 것은 계속해서 존재하려 하고, 한번 움직인 것은 (마찰만 없으면) 계속해서 움직이는 상태에 있으려 하고, 한번 멈추면 (다른 충격이 없는 한)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한번 태어난 생명이 어떻게든 가능하면 자기 수명을 늘여 가려는 것도 그런 큰 원리 속에서 나오는 것일까.
자기 정체성도 그런 것에 속한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지속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체성이다.
작가 중에는 실명을 쓰는 사람이 많지만 가명, 필명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처음 데뷔하면서 필명을 지어 글을 쓸 때는 그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가령 엘레나 페란테 같은 필명을 쓰는 '얼굴 없는' 작가는 실명이 무엇인지, 어디 사는 누구인지조차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활동한다. 꽤 오래 조용한 걸 보면 혹시나 그 사이 사망한 건 아닐까), 필명마저도 여러 개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자기 실명 말고도 70여 개의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다.
나도 어쩌다 '더듬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해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다시 한 번 바꿔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잠시 생각이 머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라는 리어왕의 절규, 누가 봐도 파이프인 그림을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붙인 화가, 당신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든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했던 철학자...
가끔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행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할까 생각해 보면 흔쾌히 동의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곤 한다. 왜일까.
내 안에 여럿이 웅크리고 있다가 (그런 점에서 다중이다) 어떤 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그게 오로지 나인 듯 행세한다. 또 다른 관계, 또 다른 상황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대신 고개를 들고 나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 모든 것을 살펴보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것도 같고. 이 여럿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서로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많은 사상가, 심리학자, 철학자들은 이런 자아의 복수성, 대화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그래서 내면화된 자아라고 이야기한 사회학자도 있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의 자아라는 것도 관념(idea)의 다발일 뿐이라고 했지만, 우리 정신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일하게 고정불변한 것이라기보다 뭔가 혼돈과 질서가 뒤섞인 채 뭉쳤다 쪼개졌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어떤 구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구름이 자칫 완전히 흩어져 버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몸이다. 그렇게 보면 정신은 몸에 깃들어 있는 무엇, 산에 걸린 구름 모자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구름 모자에 가려진, 그 너머의 무엇이 진정한 나일까.
어쨌든 내가 김훈 같은 작가는 아니어도, 그의 '일필오' 비슷한 약속은 이 횡설수설 에세이로 지켰다.
댓글
정말 공감갑니다! 가끔은 배우인 것 처럼, 어느 순간엔 연기에 임하고 있는 것 처럼, 내가 아닌 척 하는 흥미진진함이 활력을 주기도 하겠지요. 그러고 나서 다시 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새삼 놀랍게 느껴질지도요! 사실은 누구로 보여졌든 간에 내가 아닌적이 없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