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아침 일과는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주의를 기울여 짚어 보면 많은 차이를 얘기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내가 하루를 대하는 마음가짐에는 변화를 느낀다. 큰 변화를 느낀다.
어제 저녁 책 읽기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가 어떤 깨달음, 고양되는 체험의 순간을 '섬광'이라는 말로 표현하던 때였다. 나는 그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봤을 때라든가, 옛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보조조명 기구를 펑하고 터뜨리던 순간 (이건 내가 체험했다기보다 영화에서 본 걸 내 것으로 착각하는 건지도), 혹은 안과에서 시력 검사 중에 어떤 기구 앞에서는 턱을 갖다 대고 눈앞의 발광점을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번쩍하고 형광색 빛이 터지듯 번쩍인 후에 내 망막에는 잔상이 한동안 남는 그런 경험.
여하튼 오늘 아침 내 주변의 것들은 변화가 없었지만 내 마음의 눈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내 오늘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놓는다는 사실. 결국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시선이고 인식이고 해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내 삶을,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 수 있게 한다. 그런 사람의 가냘픈 노력이 조금씩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 나간다. 그것이 가르침과 배움 사이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위력이다. 나의 변화는 내 내면에서 시작된다. 말과 글은 내면을 바꾸는 힘이 있기에 놀랍고도 무서운 것이다.
인생에서 만루 홈런 같은 한방을 기대하(고 그것으로 성패를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적시타를 요령껏 노리(심지어 곧잘 치거나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희생 번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런 사람의 생각과 삶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하게 된다.
무풍지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미풍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무풍의 반대 현상은 돌풍이나 폭풍쯤 되겠다.
그런 바람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그게 맘처럼 되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바람에 맞서서 부서지거나 휩쓸리기보다 흐름을 타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날 AI로 대표되는 기술의 급류에 대한 대응법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파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세상을 바다라고 치면
모래사장에서 일광욕만 하는 사람이 있고
해변에 밀려드는 잔 파도에 발장난만 치는 사람이 있고
안전한 유아용 풀에서 물놀이만 하는 사람이 있고
영화 '마틴 에덴'의 마지막 장면처럼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망망대해를 여러 번 항해해 본 적이 있다.
세상은 인생은 더 큰 무한대해다.
왜 안전하지만 좁게 가둬 놓은 풀 안에서 익숙한 영법으로 정해진 구간만 오가야 할까.
어제 독서 모임에서 사랑 이야기도 나왔다.
인간의 훌륭한 노력들은 결국 깔대기의 주입구처럼 사랑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 범위를 넓혀가고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
사랑의 발견과 발명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게 뭐라고
망망대해 앞에서는 산처럼 움직이는 파도 앞에서 내 마음도 그런 폭으로 일렁인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내 앞의 무풍지대도 통과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책도 상품이 되다 보니, 요즘 적잖은 독자들은 '맘에 드는' 책을 사고 말고 한다. '맘에 들면'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책이 된다. 기호와 취향의 소비가 되었다. 읽기도 전에 품평가가 되어 있고, 재단하기 시작한다. 추천사 명단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구매를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저자도 책에 아부하듯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출판사는 그런 책을 팔아 매출을 올리기에 바쁘다.
저자도 독자도 판매와 구매, 공급과 소비가 되었다.
소비를 읽기로 오해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딱한 일이다.
책을 쓰는 목적이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책은 무엇보다 '배움'의 도구인 때가 있었다.
이 문제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단순한 문제가 아닌데다 (이미 앞에서 한 말은 사안을 단순화시킨 감이 있다) 제대로 얘기하려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내가 하루를 대하는 마음가짐에는 변화를 느낀다. 큰 변화를 느낀다.
어제 저녁 책 읽기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한다.
내가 어떤 깨달음, 고양되는 체험의 순간을 '섬광'이라는 말로 표현하던 때였다. 나는 그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봤을 때라든가, 옛날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보조조명 기구를 펑하고 터뜨리던 순간 (이건 내가 체험했다기보다 영화에서 본 걸 내 것으로 착각하는 건지도), 혹은 안과에서 시력 검사 중에 어떤 기구 앞에서는 턱을 갖다 대고 눈앞의 발광점을 바라보고 있으면 갑자기 번쩍하고 형광색 빛이 터지듯 번쩍인 후에 내 망막에는 잔상이 한동안 남는 그런 경험.
여하튼 오늘 아침 내 주변의 것들은 변화가 없었지만 내 마음의 눈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내 오늘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놓는다는 사실. 결국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시선이고 인식이고 해석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는 내 삶을,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 수 있게 한다. 그런 사람의 가냘픈 노력이 조금씩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 나간다. 그것이 가르침과 배움 사이에서 일어나는 깨달음의 위력이다. 나의 변화는 내 내면에서 시작된다. 말과 글은 내면을 바꾸는 힘이 있기에 놀랍고도 무서운 것이다.
인생에서 만루 홈런 같은 한방을 기대하(고 그것으로 성패를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적시타를 요령껏 노리(심지어 곧잘 치거나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희생 번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런 사람의 생각과 삶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하게 된다.
무풍지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미풍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무풍의 반대 현상은 돌풍이나 폭풍쯤 되겠다.
그런 바람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하지만 그게 맘처럼 되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바람에 맞서서 부서지거나 휩쓸리기보다 흐름을 타는 것이 현명하다.
오늘날 AI로 대표되는 기술의 급류에 대한 대응법도 그래야 할 것 같다.
파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세상을 바다라고 치면
모래사장에서 일광욕만 하는 사람이 있고
해변에 밀려드는 잔 파도에 발장난만 치는 사람이 있고
안전한 유아용 풀에서 물놀이만 하는 사람이 있고
영화 '마틴 에덴'의 마지막 장면처럼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망망대해를 여러 번 항해해 본 적이 있다.
세상은 인생은 더 큰 무한대해다.
왜 안전하지만 좁게 가둬 놓은 풀 안에서 익숙한 영법으로 정해진 구간만 오가야 할까.
어제 독서 모임에서 사랑 이야기도 나왔다.
인간의 훌륭한 노력들은 결국 깔대기의 주입구처럼 사랑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사랑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 범위를 넓혀가고 한계를 시험해보는 것.
사랑의 발견과 발명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게 뭐라고
망망대해 앞에서는 산처럼 움직이는 파도 앞에서 내 마음도 그런 폭으로 일렁인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내 앞의 무풍지대도 통과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책도 상품이 되다 보니, 요즘 적잖은 독자들은 '맘에 드는' 책을 사고 말고 한다. '맘에 들면'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책이 된다. 기호와 취향의 소비가 되었다. 읽기도 전에 품평가가 되어 있고, 재단하기 시작한다. 추천사 명단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구매를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저자도 책에 아부하듯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출판사는 그런 책을 팔아 매출을 올리기에 바쁘다.
저자도 독자도 판매와 구매, 공급과 소비가 되었다.
소비를 읽기로 오해하거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딱한 일이다.
책을 쓰는 목적이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책은 무엇보다 '배움'의 도구인 때가 있었다.
이 문제는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단순한 문제가 아닌데다 (이미 앞에서 한 말은 사안을 단순화시킨 감이 있다) 제대로 얘기하려면 해야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