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저귐과 교감

더듬이
2025-05-23 09:38
소셜미디어 X의 원래 이름은 트위터다. 일론 머스크가 인수를 해서 이름을 바꿔 단 후에도 원래 이름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트위터의 원 뜻은 '새가 지저귀다'이다. 영어 단어의 발음부터가 원래 트위터 로고의 하늘색 파랑새처럼 작은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를 닮았다. 트윗 트윗..

아침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저희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밤새 미뤄 놓았던 수다를 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새의 노래 소리도 참여하는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일종의 승수 효과가 일어나는 것인지, 독창에서 중창으로, 다시 합창처럼 가면서 점점 크고 요란해진다.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서 아침에 온갖 매체에서 뉴스를 쏟아 놓는 것을 보면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온갖 소식과 정보들로 서로 요란하게 지저귄다.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에 쉴 새 없이 시시각각 새로운 단문이 올라오는 걸 보면 시각적으로도 확연하다. 
파울 클레의 판화 중에는 ‘트위터링 머신’이라는 제목의 것도 있다. 말 그대로 새처럼 지저귀는 기계 형상이다. 지금의 소셜 미디어를 예견한 걸까.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그만큼 중요한 것(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혹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찾아가는 길이니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문답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인다.

아마 요즘 같으면 '진지충'으로 불렸을 법하다. 사실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너무 진지하기만 해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날씨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분위기에 다짜고짜 삶의 진리를 논하기 시작하면 있던 관심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런 진지함과 대비되는 것으로 유머가 있다. 경직돼 있거나 어색한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하고 어떤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상대의 호감을 먼저 사는 데 유머만 한 게 없다. 유머 감각은 일종의 재치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좋아 한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런 유머 감각의 발휘는 더더욱 중요하다. 모두를 한바탕 웃게 한 다음에야 무슨 일이든 함께 잘할 수 있다. 언젠가 쿠바 사람이 자신들은 "사형장에 가서도 누군가 유머를 건넬 만큼 낙천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랑스레 소개하는 말을 한 게 떠오른다.

그렇다고 매사에 유머만으로 대처하거나 넘기려는 사람은 자칫 '실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진지함이 시와 때를 가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머도 분별이 동반되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결국 대화는 상대적인(나만의 일이 아니라 상대를 둔) 활동이고 따라서 관건은 교감이다. 대화를 할 때에는 자기 생각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말을 듣는(받아들이는) 상대의 마음/정신 상태를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최종 성패의 척도는 '수신율'이고 '동조율'인 것이다.

오늘날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는 구조적으로 상대(수신자)의 상태를 헤아리기보다 각자 자신의 어떤 것(이 역시 진정성 여부는 뒤로 밀린다)을 발신하는 데 극대화되어 있다. 이 상호 교감의 비대칭과 불균형이 정보와 뉴스의 소음 홍수 속 개인의 외로움과 새로운 부족주의를 증폭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미디어도 기술이다. 정보와 의사의 전달과 소통을 위한 기술이다. 기술은 사용 목적에 맞게 잘 기능하느냐에 따라 평가되고 수정, 나아가 폐기되어야 한다. 한동안은 그랬다.
그러나 지금 디지털 기술의 많은 것들은 시장 지배적인 개발 기업이 주기적으로 내놓는 기기에 대해 사용자인 개인은 평가하고 수정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주어지는 대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말아야 하는데, (그 사이 많은 요인들에 의해) 사용을 거부하기는 어렵게 돼 간다. 자기 돈으로 기기를 사서도 기술이 허용하거나 가능하게 한 조건과 방식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자유' 구매이고 갖가지 옵션도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고 선전한다. 알 카포네가 즐겨 사용한 '거절할 수 없는 제안들'이다.)
이 과정에서 기술이 수행한다(고객의 수요를 만족시킨다)고 하는 활동이 사실은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셜 미디어가 그렇다. 우리는 사용하면서 느낀다. 그러면서도 개인으로서는 어쩌지 못하고 하나둘 (사람에 따라서는 제한적으로) 적응해 간다.
미디어의 무엇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큰 문제는 아닌) 보조적인 편리함이고 무엇이 (훼손되면 안 될 결정적인) 본질인지 따져 봐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따져 볼 여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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