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고요한
2025-06-02 08:40

예전에는 글짓기 경연대회를 백일장이라고 불렀다.
초중고 시절 학교에서는 어떤 기념일이 되면 백일장을 열곤 했다. 학교뿐만 아니라 시군구, 전국 단위의 백일장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교생이 참가해서 글을 써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반이나 학교 단위에서 선발을 거쳐 본선에서 최종으로 우열을 가리거나 등위를 매겨 시상을 하곤 했다.
백일장 말고도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온갖 시험이 끊이지 않았다. 과목 별로 보는 쪽지 시험부터 매년 학기 별로 반복되는 중간/기말 고사, 고입, 대입 시험, 그후에도 이어지는 시험, 시험들...

살아가는 인생이 평생에 걸쳐 쓴 글 한 편(몇 권일 수도 백지일 수도 있다)제출해야 하는 자율 백일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태어나서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고사장(드넓게 펼쳐진 세상)에 와 있다.
작문을 위한 시제도 따로 없다. 그냥 이런 상황(세상) 자체가 각자에게 알 수 없는 물음표이고 문제거리로 제시된다.
그 막연한 물음표이며 문제거리를 자신이 이해하고 남들도 알 만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부터가 1차적인 숙제다.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를 파악하거나 설정하고는 그에 맞게 알아서 최선의 답을 써서 제출하고 고사장을 나가는 백일장.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감독관도 따로 없고 뭘 보고 쓰든 상관도 없는 오픈북 방식이다. 이전에 제출된 답을 봐도 좋고 주변의 다른 수험생의 답을 넘겨봐도 (그 사람이 막지만 않는다면) 무방하고 다른 사람에게 묻거나 상의하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최종적으로 그걸 정말 자신의 답안으로 제출하고 퇴장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만 하면 된다. 
제한 시간도 미리 정해지거나 알려진 게 없다. 자기가 알아서 감안해서 답안(글)을 써나가야 한다.
미처 다 쓰지 못했는데 갑자기 쫓겨나가듯 퇴장당할 수도 있고, 딱히 더 쓸게 없는데도 무료하게 고사장을 떠나지 못한 채 미적댈 수도 있다.
다만 이 인생 백일장의 특징은 채점자도 따로 없고 채점 기준이라든가 그에 따른 평가나 포상 여부도 사전에 알려진 게 없다. 서로 수근대거나 추측만 할 뿐이다. 아니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거나. 그러니 답안 작성은커녕 백지 상태 그대로 두고 내내 잠을 자거나 그냥 퇴장해도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뷔페와 극장식당, 호텔까지 곁들인 카지노(라스베이거스가 꼭 이렇게 돼 있다)쯤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한판 크게 벌어서 최대한 많이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을 것인가를 내내 궁리하고 흡족해 하거나 아숴워하는 삶.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이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카지노장에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즐겨가며 백일장의 글감으로 삼아 답안을 써나가는 행복한 수험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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