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과 현실

더듬이
2025-06-10 13:32
사람이 서 있던 자리가 키오스크로, 사람을 응대하던 사람이 챗봇으로 바뀌어 간다. 노포가 사라지고 명장이 사라지듯, 어딜 가나 믿고 맡길 만한 경험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AI는 더 빠르게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대체해 갈 기세다. 대규모 기계 학습으로 무장한 AI에 밀려 사람이 현장에서 배우고 익힐 자리는 없어진다. 이대로라면 어느 분야나 사람이 훈련과 숙련 끝에 원숙의 경지에 이를 기회는 점점 희박해질 것이다. 전문가 계층의 사다리 걷어 차기다.
디스토피아는 초지능 기계가 자의식을 얻어 인류를 절멸시키는 상황이기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the rule of Nobody의 세계일 가능성이 크다. 일순간 기능 장애와 마비가 닥쳐도 응대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우리는 이미 ARS에 적응했거나 이따금씩 분통만 터뜨릴 뿐이다.

성인은 물론 특히 청소년들의 깊이 읽기 감소는 왜 불행인가. 책이나 긴 글은 뇌신경을 특별한 방식으로 자극한다. 읽기에 몰입할 때 언어-인지력에 관련된 다양한 부분이 활성화된다. 이 상태에서 독자는 텍스트와 자기 배경 지식을 빠르게 연결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이 생성된다.
이런 깊이 읽기가 길러주는 독립적 비판적 사고력을 시민들이 갖췄을 때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소셜 미디어 확산과 스크린 중독과 독서 인구 감소 현상과 세계 민주주의 후퇴와 포퓰리스트 권력자의 득세가 동반해서 나타나는 것은 상호 인과관계의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독서 자체가 무조건 선이라고 할 순 없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선으로 이어질 수도 해악을 낳을 수도 있다.
읽기에는 두 갈래 흐름이 있다. 힘의 증강으로서 읽기와 돌봄의 읽기가 그것이다. 둘 다 필요하지만 후자가 더 중요하다. 후자가 동반되지 않은 전자의 읽기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중 전자가 점점 힘을 키워 왔다. 그게 독서의 전부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출판독서계도 그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에서도 전자가 강조되면서 후자는 교육에서, 일상에서 밀려났다.
전자의 읽기는 종이책보다 디지털 스크린, 스마트폰 형태의 읽기로도 가능할 뿐 아니라 더 편리하고 효율적일 수도 있다. 반면 후자의 읽기는 종이책과 같은 매체 그 자체의 물성과 마찰과 지체 효과가 주 요소가 된다.

'무엇'인 것과 '무엇 같은 것'은 다르다. 이 둘의 구분을 고대 철학에서는 중요하게 여겼다. 철학사는 둘을 구분하려는 노력,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무엇 같은 것'을 '무엇'으로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사회 생활이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가 발달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무엇 같아 보이는 것‘을 만드는 기술도 점점 발달했다. 디지털 복제 기술 시대에 와서 그것은 무섭도록 발전했다. 그 결과물이 가상현실이다. (장 보드리아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세계의 개막)
그것은 스크린 위에서 구현된다. 우리는 스크린에 눈을 뺏겨 맨눈으로 보는 세상에 둔감해져 간다. 눈을 필두로 다른 감각까지 차례차례로.
인간의 핵심은 관계다. 뼛속 깊이 관계의 동물이고 관계의 존재다. 이제는 관계는 물론 관계의 감각까지 '유사품' '대체품'으로 만족(을 못하니 더 갈구)할 정도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니까 괜찮겠지. 그래서 그냥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도 다수결이 낫지 않나?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인간은 잘 속는다. 일부가 아니라 다수가, 심지어 전부가 한꺼번에 속아 넘어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역사를 보면 그렇다. 한 시대 인류 전부가 속아 산 적도 많다. 늘 그렇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진실이란 건 없고, 맞는 것이나 옳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허무주의적 회의론이나 상대주의로의 비약으로 분별의 노력마저 꺾으려는 시도는 사절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에겐 다행히도 무엇을 모르는지 자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영문도 모르고 나왔지만, 기왕에 시작한 이 신기할 따름인 세상, 내가 어떤 곳에 있다가 떠나는지는 알고 떠나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철이 들면 나는 누구? 지금 여긴 어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실존적 질문이다. 이 질문을 하기 시작할 무렵엔 이미 우리 정신은, 사고방식은 내가 속한 사회와 문화에 의해 물들어 있다. 이것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서부터 주체적 자각과 인식의 걸음은 시작된다. 부정이나 절연이 아니라 더 심층적인 이해다. 하나둘 내력을 알아 간다. 그러면 '지금 여기 내'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즐거운 모험과 탐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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