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머리

초롱
2025-06-18 07:46
"머리색이 또 바뀌셨네요?"
"아, 그렇게 됐어요. 이번 샴푸 색이 특이해서..."
"저는 염색하신 줄 알았는데요..."
"아유, 염색한 게 아니라... 저는 눈이 안 좋아서 염색을 못해요. 친구가 샴푸를 권해줘서 그걸로 감아봤는데 이렇게 색이 나왔네요."
하얗게 센 머리 양쪽이 밝은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 있다. 보기에 나쁘지 않다.
지난번에는 분홍빛으로 물든 걸 본 것도 같고 그 전에 언젠가는 오렌지에 가까운 색으로 물든 걸 본 것도 같다.
참 개성 넘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실험적인 전위 예술가처럼 이런저런 색을 머리에 시도해 보는 활달한 분인 줄로 알았다.
"샴푸로 그런 색도 나는군요. 지난번엔 색이 달라서 염색을 바꿔가며 하시나 했어요."
"나이는 들었어도 흰 머리는 싫고, 눈에 안 좋은 염색약 대신 이것저것 써 보는 거죠. 저번엔 커피로도 감아보고 그랬어요."
어느 결에 알게 된 줄은 모르겠는데 (아마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주워들었을 것이다) 학교 선생님(아마 교장 직급이 아닐까, 그새 은퇴를 하셨을까)으로 알아온 분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나 곱게 잡힌 주름으로 보아 나이가 있는 편인데도, 평소 관리를 잘한 듯 반듯한 체형과 몸가짐에다 늘 밝은 얼굴로 보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하시고, 헤어질 때도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삿말을 꼭 덧붙이셔서 단박에 호감을 느끼게 된 분이었다.
오래 학교 선생님으로 지내온 분인데도 머리에 다양한 색으로 물도 들일 줄 아는 분이라고 생각하니 호감은 더 커졌다.

오래전에 나 역시 머리에 물을 들여본 적이 있다.
지방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인데, 서울 본사 사람들과 멀어져 생활하게 된 김에 파격적인 변신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배포가 큰 편은 못 되어서, 오렌지까지는 아니고 밝은 황갈색으로 머리 전체를 염색하고 나니, 내 기분, 심지어 나 자신의 정체성까지 살짝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해방감 같은 것도. 미용실을 나서면서 실없이 혼자 히죽히죽 웃었던 기억이 난다. 
1년여 머리색이 주는 해방감 속에서 잘 지냈던 것 같다.
서울로 복귀하면서 다시 검은 머리로 돌아올 때는 내 안의 어떤 자아와 작별하는 아쉬움까지 느껴졌다.
그때 여러가지 다양한 색으로 염색을 해볼 걸 그랬나,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던 차에 이 분을 보니 참 젊고 밝고 명랑하게 사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이 분과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재미있는 사연들이 많을 것 같고, 여러 번 감동을 할 것 같다.
자주 웃다가 가끔은 눈물이 핑 도는 순간도 있을 것도 같다.
(언젠가부터 나는 잘산 사람이란 추억거리,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 주고 싶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사피엔스의 기원도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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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새로 | 13일 전
저도 귀찮다는 핑계로 염색을 안하는데, 가끔은 익숙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보는 일도 즐거운 것 같아요.
어쩌면 저도 '귀찮다'는 말로 가장 무난한 걸 선택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언젠가 초롱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들도 직접 들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ㅎㅎ
늘보리 | 10일 전
샴푸만으로 염색 효과가 날 수 있다니, 어떤 제품인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ㅎㅎ 머리에 조금만 변화를 줘도 기분전환이 확 되는데, 매일매일 색다른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