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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 마찰

더듬이
2025-10-23 22:48
닷컴 붐이 한창일 때 실리콘밸리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당시 꿈의 직장으로 꼽히던 구글 캠퍼스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무료라는 구내 뷔페 식당에도 가보고 했다. 그때 실리콘밸리 창업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업 컨설턴트도 만나 이야기하던 중에 '찬물 샤워'를 처음 들었다.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으로 회자되던 수칙 중 하나로 그곳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유행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하는 정신을 차가운 물벼락으로 번쩍 깨어나게 하는 충격 요법이다. 밤새 일하거나 공부할 때 레드불을 몇 캔씩 마신다거나 진한 블랙 커피로 아침을 시작하는 거나 모두 일맥상통하는 생산성 극대화의 습관이다. 그런 각성 효과와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샤워 중에 뇌가 이른바 디폴트 모드(일종의 중립 기어 상태)에 들어가면 생각이 좀 더 자유로워져 새로운 아이디어도 잘 떠오른다. (이건 내 체험으로 볼 때도 맞는 말 같다.)
사실 실리콘밸리의 성공하는 사람들 습관으로 유행하기 오래 전에 이미 우리 선조는 냉수 마찰이라는 걸 해왔다. 보일러라고는 꿈도 못 꾸고 땔감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본의 아니게 체득하게 되었거나 자조적으로 위안 삼아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살짝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걸 요즘 내가 느낀다.
아침 운동 후 샤워는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거니와, 날이 따뜻하거나 특히 무더운 여름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냉수로 샤워를 하기 마련인데, 이맘때처럼 조금씩 날이 추워지게 되면 보일러를 가동하고 온수로 샤워하는 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올해 가을은 아직까지 보일러도 온수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난방비를 아끼려는 계산이 무의식 중에라도 작동해서인지는 나도 확신할 순 없지만, 미세하게 찬물이 말 그대로 차갑게 느껴지면서 이젠 온수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그냥 참고 찬물로 샤워를 해봤고, 음 할 만하네, 참고 하루 하루를 이어가다 보니 지금은 찬물 샤워를 즐기게 되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내 마음 속 하나의 또 다른 동기로 작동한 것은 남극에서 냉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본 일일 것이다. 북극에서도 그랬는데, 추운 극지 여행 일정 중에는 반드시 하나의 기념 이벤트로 차가운 바닷물에 수영복 차림으로 뛰어들었다가 나올 기회를 주는 짖궃은 놀이 같은 행사를 벌이곤 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자원자도 많았다. 나도 극지의 얼음 바다에 몸을 담그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피치 못할 다른 사정(?)이 있어서 용감한 반라의 남녀들을 보며 탄성만 발하고 온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실 얼음 냉수 마찰이라든가, 극지의 차디찬 바닷물속 뛰어들기라고 해서 사람들은 경이롭게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선입견에서 비롯한 심리적 벽만 넘어서면 별 게 아니다. 과학적으로 이해하면 된다. 우리가 피부로 더위나 추위를 느끼는 것은 몸의 열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거나 너무 빠르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온 동물이어서 적정한 온도를 유지할 때 쾌적함을 느낀다. 주변 온도가 조금씩 서서히 변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몸도 덩달아 적응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갑자기 온도가 오르거나 내려 갈 때는 적응 기능이 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이 때 보내는 체감 신호가 더위와 추위다.
그런데 우리 몸은 나름대로 보온 기능이 있다. 피부가 바깥과의 차단벽(막에 가까운)을 형성하고 있고, 피하 지방층이 바깥의 급변에도 체내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 단열재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의 온도 변화도 극심한 정도(화재나 급속 냉각)가 아닌 이상 일정 시간은 별 문제 없이 지낼 수 있다. 극지에 가서도 평균 기온은 낮지만 해가 떠 있고 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반팔 셔츠 차림으로도 온기를 느끼며 쾌적하게 밖을 거닐 수 있다. 특히 방한복을 갖춰 입은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갑자기 열을 많이 뺏기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냉수 마찰의 요령도 그것이다. 요즘 같으면 집안 욕실에서 샤워를 위해 옷을 다 벗었다고 해서 당장 추위를 느끼진 않는다. 여기에 찬물을 몸에 끼얹는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만큼의 '고통'(한기도 심리적 충격을 주는 고통이라고 한다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찬물 아래에서 손으로 빠르게 얼굴을 문질러 세수하듯 팔다리 온몸을 빠르게 마찰하면 잠시잠깐의 추위는 어느새 달아나고 몸이 적응을 하게 된다. 정신이 들면서 기분도 기운도 상승하게 된다. 마치고 전신 타월로 몸을 감싸고 머리를 말릴 때는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이제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으로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겠다는 기운이 샘처럼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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