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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정치

페소아 프로필 페소아
2026-01-07 18:38
현대 사회, 특히 미국 사회를 삼키다시피 한 '불만의 정치grievance politics'를 분석한 글을 발췌해 올린다. 우리 사회에도 일부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서다. 나아가 때때로 한 개인을 화염처럼 휩싸는 부정적 에너지에 대한 대처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오늘날 정치는 결코 달랠 수 없는 불만으로 움직인다. 민주주의의 생존을 위해 이것과 맞서야 한다.

‘사람들이 증오를 그토록 완강히 붙잡는 이유 중 하나는, 증오가 사라지면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제임스 볼드윈, 『고향의 아들 노트』(1955)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고 긍정하며 존중하는 것보다 반대하고 거부하며 증오하는 것에 더 이끌리는 것 같다. 자신의 정치 신념, 정체성, 감정적 삶이 긍정적인 이상이나 열망보다는 반대와 원한, 적대감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2025년 4월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 100일을 기념하는 연단에 섰을 때 분위기는 축하가 아닌 전투적인 것이었다. 비난하고 공격하고, 허위 주장을 반복하고, 허구적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어조는 분노에 찼고 초점은 적과 보복에 맞춰졌다.

미국만이 아니다. 곳곳의 정치 지도자들은 끝없는 불만을 동력으로 삼아 지지 세력을 부추기고 동원한다. 그들의 에너지, 의미, 심지어 정체성마저 싸워야 할 끝없는 적들의 목록에 의존한다.

여기에 어떤 역학이 존재한다: 특정 개인과 운동은 영원한 대립을 위해 설계된 듯하다. 한 가지 불만이 해소되면 다른 불만이 발견된다. 한 적을 물리치면 다른 적을 찾는다. 이처럼 끊임없이 적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뭘까?

일부는 전술적이다. 반대와 비난으로 추종자를 모으고 관심 끌기 수단으로 분노를 유발하거나 불만을 부추긴다. 이 모든 게 연기인지도 모른다. 진짜 관심사는 팔로워 수를 극대화하거나, 브랜드를 구축하거나, 당선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특정 개인은 계산적이더라도 추종자들은 정말 분노와 비난에 사로잡힌 듯 보인다.

끝없는 비난과 불만의 패턴에 학자들은 주목해왔다. 불만의 정치는 공포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부추기고, 집중시키고, 격화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적대적 입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전 반대 시위와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또한 모두 반대와 불만의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목표를 향했다. 최근의 운동들은 다르다. 이들의 에너지, 결속력, 정체성은 반대 그 자체에 의존하는 듯하다. 불만이 추종자들을 움직이고, 적에 대한 적대감이 그들의 사고, 감정, 자아 인식의 중심이 된다. 중요한 것은 특정 목표의 달성보다는 지속적인 적대감의 표현이다. 적대자가 없다면 운동은 해체될 것이다.

적대감, 분노, 반대 자체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소중한 무엇인가가 위협받는 데 대한 도덕적 관심과 정당한 반응의 징후일 수도 있다. 누스바움이 주장했듯, 분노는 도덕적 관심을 표현하고 집단 행동을 촉발함으로써 민주적 삶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최고의 과업은 사람들을 조직하고 단결시켜 그들의 분노가 변혁의 힘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유된 선을 실현하기 위한 대립과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대립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운동은 대립을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어떤 운동은 대립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전자는 조건부 부정적(contingently negative) 지향인 반면 후자는 본질적 부정적(constitutively negative) 지향이다.

불만의 정치는 본질적 부정적 지향성을 품고 있다. 해방 운동, 이상 실현을 위한 투쟁, 소중한 가치 수호의 노력과는 다르다. 뭔가 소중히 여긴다면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드는 건 정상이다. 그러나 본질적 부정적 지향성은 가치를 단지 적대감을 표현하기 위한 구실로 삼는다. 핵심 욕구는 보호나 보존이 아니라 반대하는 것이다.
 
왜 누군가는 본질적 부정적 성향에 끌리는가? 왜 이런 성향은 그토록 매혹적인가? 강력한 심리적·존재론적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는 내적 고통을 외적 적대감으로 전환시키고, 고양된 가치감을 제공하며 무력감을 의로움으로 바꾼다.

이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감정과 감정 메커니즘을 구분해야 한다. 분노, 증오, 슬픔, 사랑, 두려움 같은 감정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감정 메커니즘은 더 미묘하고 종종 간과된다. 이는 개별 감정이 아니라 한 감정 상태가 다른 상태로 바뀌는 심리 과정이다. 특정 감정 집합을 입력받아 다른 감정 집합을 출력으로 생성한다.

가령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원하는 건 힘들다. 간절히 원하는데 얻을 수 없다면 불안과 좌절감, 질투까지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좌절감과 질투를 무시와 거부로 전환하려는 심리적 압박이 생긴다. 모욕감과 낮은 자존감을 악의적 증오로 바꾸려는 유사한 심리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철학자들은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 부른다. 원한을 뜻하는 프랑스어이지만 변형된 의미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고통, 무력감, 모욕감을 비난으로 전환시키는 더 깊은 감정적 메커니즘을 말한다.

19세기 후반 니체는 르상티망이 우리 가치관의 많은 부분에 숨겨진 감정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도덕의 계보』(1887)에서 "현대의 '도덕'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탄생시킬 때 시작된다"라고 썼다. 이후 다양한 사상가들이 르상티망이 사회·정치적 삶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해왔다.

웬디 브라운은 르상티망을 세 가지 산출로 설명한다: 상처를 압도하는 감정(분노, 의로움)을 생산하고, 상처의 책임을 물을 가해자를 생산하며, 상처를 대체할 복수의 장소를 생산한다. 요컨대, 르상티망은 무가치함이나 굴욕감을 복수심에 찬 우월감, 원한, 비난으로 변환시키는 감정 메커니즘이다.

개인의 삶에서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쇠퇴하는 시골 마을에서 자란 여성을 상상해보자. 도피를 꿈꾸며 도시에서 묘사되는 활기찬 삶, 문화와 기회, 부와 성공으로 가득한 삶을 동경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달성 불가능해 보인다. 불행과 좌절감 끝에 인생의 실패자처럼 느껴진다. 이때 포퓰리즘적 수사를 접하게 된다. 한때 부러워했던 이들이 자기 고통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한때 좋아 보였던 그들의 삶의 모습이 이제는 불의로 보인다. 구조적 경제적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 제안에 집중하기보다 비난과 적대감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또 다른 사례로, 외로운 한 남자를 상상해보자. 다른 이들이 우정을 쌓고 관계를 형성하며 사회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지만, 자신은 주변부에 머물며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다 인터넷의 한 구석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세상이다. 문제의 사이트를 읽으며 페미니즘, 사회적 규범, 문화적 위선이 자기 같은 사람에게 참된 연결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믿게 된다. 실망은 빗나산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통찰력의 증거가 된다. 슬픔은 분노로 변한다. 비난할 적과 토로할 불만을 갖게 된다.

앞의 여성 사례는 실제 구조적인 경제적 불의의 형태를 다루는 반면, 후자의 남성은 불만을 창조해내는 이념을 다룬다. 그러나 이 차이 너머에는 유사한 감정적 흐름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책임을 전가하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그들의 불행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타인의 잘못이다. 그들은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으며 공격당하고, 억압당하거나 훼손당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유혹적이다. 자존감이 떨어진 느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고통을 회피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또한 이 이야기를 강화해주는 동질감 있는 동료들의 공동체도 제공한다.

그 결과 일종의 부정적 연대감이 생겨난다: 적대감으로 뭉친 그들은 외부 집단을 공격하거나 폄하한다. 개인은 이제 분노를 공유하고 같은 적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속하게 된다. 삶의 혼란과 소용돌이는 의로움이라는 명확한 서사로 재구성된다: 적에 맞서 싸움으로써 우리는 선해진다는.

20세기 사상가 지라르와 엘리아데가 상기시키듯, 대립은 분열뿐 아니라 결속도 이룬다. 지라르는 공동체가 공통의 적을 통해 단결을 형성하고, 두려움과 좌절을 희생양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파악했다. 공유된 비난 행위는 안도감뿐 아니라 소속감도 제공한다. 엘리아데는 다른 각도에서 개인적 고통을 더 크고 도덕적 긴장감이 넘치는 드라마로 담으려는 인간의 갈망을 탐구했다.

분노의 정치는 이 두 패턴을 모두 활용한다. 단순히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이야기로 엮어낸다. 고난이 불의로, 분노가 정체성으로 전환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이러한 패턴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학자들은 고통, 실망, 실패감이 어떻게 불만으로 변모하는지, 개인적 좌절이 어떻게 정치적 정체성이 되는지 추적해왔다.

이런 운동들은 더 이상 선에 대한 공유된 비전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는다. 공유된 적대감에 의해 구조화된다. 반대는 수단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 일관성, 연대를 생성하는 구조 자체가 된다.

이런 서사는 대개는 실제 문제와 정당한 불만에서 시작된다. 앞의 여성의 경제적 사례가 확실히 그렇다. 가장 효과적인 서사는 표면적으로 그럴듯하다. 그러나 과장되고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기회가 희박하고 재정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분노의 서사는 이를 비난과 적대감의 이야기로 전환하며, 누가 책임자이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지극히 단순한 그림을 그린다. 진정한 좌절감을 전면적인 적대감으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이런 운동들은 반드시 적을 필요로 한다. 배제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어떤 선이나 실현할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건부 부정적 지향과 달리,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지향은 저항, 적대감, 부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들의 정체성은 반대할 대상의 지속성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적 없이는 기능할 수 없는 일종의 정치적 대사 과정이 생긴다. 적이 사라지면 그 지향은 형태를 잃는다.

물론 정당한 대의도 종종 저항과 적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문제의 핵심은 구조적이다: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지향성에서 반대는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된다. 해결은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에 위협이 된다. 해결은 운동에 목적을 부여하는 바로 그 적대감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집회는 단순히 전략적이거나 퍼포먼스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공격의 수사학으로 구축된 소속감의 구조를 유지한다. 그들은 부정 속에서 살아간다.

전통적인 그림에서 불만은 이상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둘러보고 그것이 이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며 특정 불의가 존재함을 본다. 거기서 우리는 이런 불의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식별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불만의 정치는 다르게 작동한다. 이상이 아닌 불안감, 무력감, 실패감, 굴욕감 또는 부족함에서 시작된다. 이런 자기 지향적 부정적 감정을 적대감, 분노, 비난으로 전환시키는 정치적·윤리적 수사법이 제시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 머물렀을 부정적 감정은 새로운 출구를 찾아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적과 불만에 달라붙는다.

불만의 정치에 대한 전통적 대응 방식이 역효과를 내는 이유다. 그들이 원하는 것 일부를 그냥 주면 안 되나? 타협하거나 달래거나 중간에서 만나면 안 되나? 불만을 해소하면 적대감이 가라앉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요구가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요구가 나타난다. 특정 목표나 요구 자체가 핵심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대립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진정으로 유지되는 것은 감정적 지향성, 즉 적에 대한 욕구다.

불만의 정치를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지향성으로 이해하면 대응 방식도 달라진다. 사실 확인, 달래기, 정책 양보는 실패하기 쉽다. 원인이 아닌 증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반대 그 자체가 정서적 해결과 정체성의 원천이라면, 해결은 이들에게 이득이 아닌 상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운동의 활력을 고갈시킨다. 그래서 매번 유화책 뒤에는 새로운 불만, 새로운 적, 새로운 분노의 원인이 뒤따른다. 핵심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싸우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역학 관계를 이해하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명확해진다. 목표는 단순히 허위 주장을 반박하거나 적대감을 비난하거나 유화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은 불만 정치가 동원하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적대적 대립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적 형태의 의미, 정체성, 소속감이 필요하다.

즉, 불만이 아닌 긍정성에 기반한 방향성을 필요로 한다. 적대감에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경외하며, 소중히 여길 만한 무엇에 대한 헌신에서 힘을 얻는 방향성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헌신을 지탱할 수 있는 서사들이다. 헌신은 사랑이나 경외심에 헌신과 인내할 의지를 결합한 애착의 형태다.
 
헌신은 개인을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 즉 어려움이나 의심 속에서도 삶의 형태를 부여하는 대상 쪽으로 방향을 잡게 한다.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성과 마찬가지로 헌신도 정체성, 목적, 소속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엔 적이 필요없다. 그 에너지는 대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에 대한 충실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헌신은 적대감이나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의미, 정체성, 목적감을 제공할 수 있다. 이 관점은 조시아 로이스의 주장과 공명한다. 그는 충성심(헌신의 한 형태로 이해)이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실용적 문제, 즉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잘하는가? 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해리 프랭크퍼트의 주장, 즉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그 자체를 위해 소중히 여기는 가치에 헌신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주장과도 부합하며, '헌신의 직접적이고 주요한 효과는 마음의 영적 기쁨'이라는 아퀴나스의 관찰과도 일치한다. 이렇게 이해된 헌신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확고한 반응으로, 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평온한 충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

물론, 불만의 정치의 대안으로 헌신을 제시하는 것이 모든 불만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 체계적 인종차별, 정치적 배제 등 수많은 고통과 불의는 깊은 좌절과 지속적인 저항을 정당화한다. 실제 피해 앞에서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결코 병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적절한 경우가 많다. 분노, 불만, 비판은 필수적인 정치적 도구다.

불만의 정치를 문제로 만드는 것은 불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성이다. 불만의 정치는 회복이나 변혁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반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뿌리를 둔다. 문제는 불만 그 자체가 아니라, 영원한 불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고 반대가 열망을 대체할 때 발생한다.

불만의 정치는 일관성, 에너지, 소속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영원한 대립을 삶의 중심으로 둠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심리적·존재론적 만족감은 실재하지만 심대하게 해롭다. 적대감을 통해 정체성이 구축되면 그것은 갈등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정체성이 멈출 수도 쉴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어렵고 깊은 과제는 단순히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정책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적의의 바다 없이도 정체성과 의미,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더 어려운 과제이지만 불만의 정치를 극복할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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