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세상의 시민처럼 살아라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4-18 10:42
얼마 전 미국 공영 PBS 방송에서 소로에 관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뒤이어 그에 관한 새로운 평전(Gal Beckerman의 How to Be a Dissident)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 미국의 참담하고도 암담한 상황에서 소로가 다시 불려나오는 이유는 뭘까. 그 함의는 미국에만 그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저자가 저서의 일부를 기고한 것을 보고 발췌 번역해 이곳에도 소개한다.
 
원문: If You Want a Better World, Act Like You Live in It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그곳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라
소로는 ‘예지적 의식’에 찬 반체제 인사로 살았다
   
1846년 여름 소로는 월든 호수 근처 오두막을 떠나 맡겨 놓은 신발을 찾으러 마을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세무원에게 붙잡혀 수감됐다. 장부를 정리하고 싶었던 세무원은 4년째 미납된 세금을 대신 내주겠다고까지 제안했지만 소로는 거절했다. 노예제에 반대했던 그는 납세가 그런 정부를 정당화한다는 생각에서 거부했다.
   
소로는 미국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각기 다른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자연이 우리를 보존해 주므로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환경운동가로서 소로가 있고, 국가를 의심하고 관료제에 적대적이며 자아의 주권을 신봉하는 개인주의자로서 소로가 있다. “단순하게, 단순하게”를 조언하는 인생 코치로서 소로도 있다.
   
새로운 3부작 PBS 다큐는 기이한 아웃사이더로서 소로를 보여준다. 얼어붙거나 생기 넘치는 가을 단풍에 둘러싸인 월든 호수의 이미지가 몇 분마다 스쳐 지나가고, 우리는 소로가 개미와 물고기와 교감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화는 그가 더 큰 것들, 더 넓은 패턴들, 그리고 영원한 것이 구체적인 것 안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귀 기울였다는 통찰로 반복해서 돌아간다.
   
정치적, 사회적, 기술적 격변의 시기에, 나는 또 다른 소로, 더 난삽하고 더 위험한 소로에 대해 생각해 왔다. 바로 반체제 인사인 소로, 세금을 내기보다 차라리 감옥을 택한 남자. 그는 역사 전반과 전 세계에서 독재, 신정정치, 식민주의, 부당한 체제에 저항한 이들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소로는 ‘(노예 탈출 지원) 지하철도’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1859년 존 브라운이 노예 반란을 옹호한 최초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대다수가 브라운을 테러리스트로 여겼을 때, 그는 ‘빛의 천사’라고 칭했다.
   
최근 몇 년 소로는 뜻밖의 악의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간 혐오자, 도덕적 순수주의자, 참을 수 없는 멍청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하지만 이단아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인식된다. 그는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 ‘건방진’ 인물이었다. 노예제를 혐오하는 데서도, 변해가는 나뭇잎을 홀로 명상하는 데서도 자신을 더 높은 기준에 맞추려 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곧바로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하룻밤 감옥 경험은 가장 유명한 에세이를 쓰는 계기가 됐다. ‘시민 불복종’이다. 지난 150년 동안 간디와 킹 목사 같은 인물들은 이 글을 불의에 가담하지 않고, “당신의 삶이 그 기계를 멈추게 하는 마찰력이 되게 하라”는 지침서로 읽어 왔다.
   
이 글은 또한 심리적 고백이자 소로의 오만함을 드러낸 표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은 다른 사회의 시민인 양 살아가기로 결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양심이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한다고 선언한다. “내가 감당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언제든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무정부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원칙에 의해 지배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그는 다른 누구의 자유도 방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다른 추구와 사색에 몰두하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고 썼다. 노예제를 지원하거나 멕시코 정복 전쟁을 위한 세금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굴복은 자신을 인간 이하의 존재, 그저 ‘짚이나 흙덩이’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이 땅에 얽매여 세금을 내느라 바쁜데 그가 이런 식으로 살고 행동하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배포가 필요했을지 생각해 보라. 그의 반항이 오만함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반항자가 없는 인류 역사는 노예 상태와 정체의 우울한 목록에 불과할 것이다.
   
소로는 ‘반체제 인사’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그런 행동의 기술에 능했다. 그것은 월든 호수 근처 오두막에서 2년 2개월 2일 동안의 실험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그는 다른 곳에선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진실되고 윤리적인 삶을 창조하려 시도했다. 그곳에서 그는 “비록 내가 여기서 완전히 옳지는 않더라도 이전보다는 덜 틀렸다”라고 썼다.
   
로라 다소 월스는 소로의 전기에서 그의 월든 시절을 ‘상징적인 행위 예술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늘 그를 은둔자로만 상상해 왔기에 처음엔 그 표현에 의아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콩을 재배하고 소유물을 멀리하며 계절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했던 소로의 숲속 생활은 보스턴으로 이어진 대로에서 쉽게 목격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던 누구에게나 다른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착취되거나 정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던 시절, 그는 당대엔 찾아보기 힘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과시하고 있었다.
   
20세기 소련과 동유럽의 반체제 인사들은 비슷한 마법 같은 수법을 구사했는데 그것은 ‘as if(마치 ~인 것처럼)’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인 공산 체제 아래에 살았지만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전제로 삼았던 것이다. 역사학자 티모시 가튼 애쉬가 1980년대 초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도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폴란드의 반체제 시인들과 조선소 노동자들은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가지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는데, 그 원칙이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치 자유로운 나라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라”였다.
   
19세기 미국 역시 “만인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했지만 스스로 건국 원칙을 위반하고 있었다. 반노예제 신념이 확고했던 소로에게 짧은 수감 생활은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국가를 오히려 동정하게 되었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몸을 가두는 것뿐, 그의 생각은 조금도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체제에 의해 억압받는 느낌에서 벗어나, 이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사실상 자신을 가둔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소로는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일종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예제에 반대하면서도 연방 해체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다니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직접 자신과 국가 사이의 결합을 해체하고, 국고에 할당된 몫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소로가 볼 때 그 체제는 개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으며, 개인들은 그것을 무너뜨릴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간다면 노예제는 종식될 것이었다. 그는 소수가 “다수에 순응할 때는 무력하지만”, “합친 무게로 저항할 때는 막을 수 없다”고 썼다.
   
소로는 자기 신념을 공유하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말을 쏟아낸다. 왜냐하면 스스로 상상 속의 나라에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이야말로 변혁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는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옳은 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은 사물과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이라고 썼다.
   
새로운 PBS 다큐멘터리는 소로가 어떻게 더 높은 원칙에 귀 기울였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의 확고한 신념을 설명한다. 여러 전문가들 말에 따르면, 소로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흙과 바위 같은 무기물조차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차원의 삶을 살았다. 이런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이런 일편단심은 자만심으로 쉽게 이어질 수도 있다. 2015년 저널리스트 캐서린 슐츠는 소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녀는 <월든>을 읽고 그 안에서 영광스러운 신비가 아닌 동료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이 거의 없는 위선적인 남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소로가 자기 집착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고 썼다. 노예제에 대한 그의 급진적 입장조차도 진정한 도덕적 신념이라기보다 ‘거친 개인주의’에 대한 헌신에 더 가깝다고 봤다.
   
나는 본말이 전도된 평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반체제 인사들처럼, 그는 바로 거친 개인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회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오만함이 왜 거슬릴 수 있는지 이해한다.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문제를 두고 에머슨을 포함한 소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 지나친 순수함에 이의를 제기했다. 에머슨은 일기에 소로에게 할 말을 상상하며 이렇게 적었다. “왕 한 명과 신하 한 명으로 이루어진 군주제를 제외한 그 어떤 정부도 너를 달래지 못할 것이다.” 에머슨은 납세자들이 위선자라는 소로의 암시에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일기에서 그를 진정한 위선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이런 마찰은 두 사람의 상이한 세계관을 드러냈다. 에머슨은 보다 영적인 차원에서 자기 변혁을 믿은 반면, 소로는 행동을 통해 자기 의견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체제 인사로서 소로가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타협을 거부하면서도 허무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부 바깥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이 땅의 법에 순응할 변명거리’를 찾는 것에 대해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법들은 개인을 ‘더 높고 독립적인 권력’으로 인정해야 하며, 국가의 모든 ‘권력과 권한은’ 그 개인들으로부터 파생된다고 봤다. 이것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치 그것이 이미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한 세무원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소로는 사직하라고 말했다. “피지배자가 충성을 거부하고 관리자가 직책을 사임할 때 혁명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지는 모르겠지만, 반체제 인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며 자기 행동을 통해 세상을 해체하고 재창조할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가 전투적 노예해방운동가 존 브라운을 옹호한 것은 순수한 반체제 소로의 모습이다. 학자 로이스 브라운이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듯이, 그 순간은 소로의 삶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는 노예제 문제가 설득을 통해서도, 심지어 정치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피가 흘러야만 했다. 그는 남북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고,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 브라운과 같은 용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발휘해야 할 것임을 알았다. 다른 노예제 폐지론자들도 그때쯤이면 이런 결론을 내렸을지 모르지만, 소로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있었다. 브라운을 지지함으로써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생각이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꿰뚫어 보는 이 재능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예지적 의식’이라 불렀다. 블로흐의 핵심 개념은 ‘아직 오지 않은(not-yet)’으로, 무한히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겉보기엔 가장 변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재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이런 미래의 단편을 포착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들의 ‘예지적 의식’은 마치 끌도 없거나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 모르는데도 석회암 덩어리를 보고 남녀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
   
소로가 <시민 불복종> 맨 마지막 부분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국가, 즉 개인의 존중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를 상상한다고 썼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 이런 예지적 의식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글의 강력한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이런 열매를 맺고 익는 대로 곧바로 떨어지게 내버려 두는 국가는, 내가 상상해 보았지만 아직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훨씬 더 완벽하고 영광스러운 국가를 위한 길을 닦아 놓을 것이다.” 아직은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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