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이란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4-19 10:16
인공 지능은 ‘지능’이 있는가. 인간 지능과는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지능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관계를 돌보는 능력이며, 소유물이 아니라 참여하는 방식이라는 설명. 아래 원문을 발췌해 올린다.

원문: What Is Intelligence?

로봇공학자 로드니 브룩스는 “우리가 뇌와 컴퓨터를 서로를 본떠 모델링하는 지적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한탄했다. 각 모델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일 뿐 이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는 상태다.

살아있는 지능이란 문제 해결 능력보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 살아있는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자기생산autopoiesis’을 통해 이뤄낸다. 자생이란 세포나 유기체가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달리 AI에겐 (문제가 되는) 중요한 게 없다. AI는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문제 해결이 선형적으로 이뤄진다면, 자기생산은 뇌와 신체, 그리고 세상을 순환하는 순환적 인과 관계를 수반한다.

지능을 이해하려면 인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베이컨이나 갈릴레오 같은 이들이 과학적 방법론에서 배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관점이 필요하다.

신경과학자 체(Tse)는 인과관계에 대한 관계적 관점을 제안한다. 생명의 인과성이다. 칸트가 쓴 대로, 이 인과성에서는 ‘부분들이 전체의 형태를 상호적으로 유발하고 영향을 미친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지능에 대한 기존 관점이 “신체와 환경 간의 관계를 이루는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비선형적이고 얽힌 네트워크에 선형적 구조를 강요한다”면서, 이를 ‘총체적 마음total mind’이라 불렀다.

이러한 순환적 피드백 루프를 간과하면 우리 행동의 결과-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되돌아오고 세상에 어떻게 파동을 일으키는가-를 보지 못하게 된다. 기계와 같은 직선적 연산이 지능이라면, 베이슨의 ‘총체적 마음’은 지혜에 가깝다.

지구는 그만의 방식으로 지능을 발휘한다. 의식이 아니라 지능 말이다. 이 생각은 제임스 러브록과 린 마굴리스의 가이아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총합인 생물권이 자신을 조절한다는 생각이다. 세포의 대사 네트워크가 세포막을 포함해 세포를 구성하는 성분들을 생성함으로써 세포가 지속될 수 있는 것처럼, 가이아 이론에 따르면 지구상의 생명체 또한 자신을 생성하고 그 존재를 지속시키는 대기 경계를 만들어내는 자기생성적 네트워크와 같다.

하지만 이제는 생물권 위에 ‘기술권technosphere’이 존재한다. 이는 기술, 교통, 통신 시스템 등 인간 활동의 총체를 말한다. 기술권은 자기생성적이지 않다. 정반대다.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성숙한 기술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잊어버린 듯한 생물권과 다시 연결되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능과 문제 해결 능력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인류 혼자서만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신경과학자인 체는 식물뿐 아니라 다른 동물의 지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거나 원하는지 알 방법이 없기에 사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말하는 ‘주의 기울이기’란 미리 정해진 경계와 현실을 마주하고, 단순한 관찰자로서 수동적으로 그것을 묘사하거나 재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체의 투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식물이 말을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연구자가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투과적으로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놀라운 것들을 듣기 시작한다.

물리학자들이 돌로미티 산맥의 숲에 있는 가문비나무들에 전극을 연결해 전기 신호를 기록했다. 신호를 모니터링하던 중 나무들이 갑자기 행동을 동기화하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나무들부터 시작되어 그다음으로 어린 나무들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14시간 후 일식이 일어났다.

지능은 관계를 가꾸는 방식이다.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우리와 함께하는 인간, 동물, 식물, 지구의 요소들-를 돌보는 능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더 지능적인 사람이다. 내 할머니는 새들의 수다, 심을 때와 가꿀 때, 수확할 때, 그리고 물과 바람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셨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1학년까지만 다녔지만 지극히 지혜로우셨다.

누가 지능이 있나. 새들? 양치식물? 기계? 우리가 던져왔던 질문들은 요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지능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며, 이 서로 얽혀 있는 행성 전체를 구성하는 복잡하게 얽힌 피드백 루프다. 우리의 참여가 시스템을 건강하게 유지한다면 우리는 지적인 것이고, 암처럼 시스템을 갉아먹는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의 지능에는 명제적 용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따라서 AI처럼 기계화될 수 없다. 암묵적 지식이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마치 가장 오래된 나무들이 그 징후들-천체의 정렬에서 오는 중력의 기묘한 당김-을 기억하고, 물을 보존하기 위해 미리 행동에 나서라고 숲 전체에 소식을 전한 것과
같다.

나무가 기억하거나 배우거나 소통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가정했다면, 즉 지능이 오직 개별 뇌에만 존재한다고 가정했다면 결코 던지지 않았을 질문들이다.

지능에 대한 우리의 낡은 정의는 우리가 작은 세상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나무가 일식을 기억하지 못하고, 지구가 그저 멍청하게 맴도는 바위에 불과한 세상 말이다. 오직 우리만이-우리 생물학의 깊은 곳, 우리의 총체적 마음 어딘가에서-세상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우리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능이 지구상의 생명 전체 시스템을 순환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활동과 자기 조절의 순환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임무는 그 안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태초부터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중력과 산소, 언어를 통해, 수십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화와 적응의 고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격언을 아는 식이 아니라, 암묵적이며 완전한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 우리가 알지만 미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 속에 깃든 지능을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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