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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사회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5-12-31 16:57
서로를 보지 못하고 서로가 보이지 않는 ‘비인간화’ 사회를 극복하려면
원문 The Unseen 발췌 요약

요즘 직장에서 동료를 자동화 시스템의 단자로 보는 사람,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이 많다. 모두가 본질적으로 자판기처럼 일한다. '투명인간' 같은 존재감밖에 느끼지 못한다. 대화는 불필요하거나 최소화한다.

사람에겐 사회적 연결의 욕구가 있고,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사망률 증가, 치매, 뇌졸중과 관련 있다는 것 다 안다. 성인에게 외로움은 심장병과 비만 같은 만성 질환과 관련 있으며, 외로운 어린이와 청소년은 불안이나 우울증을 겪거나 게임 중독에 빠지거나 수면 문제 있다는 것도.

하지만 지금이 과거 어느 때보다 특별히 더 외롭다고 할 순 없다. '외로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다른 종류의 위기, 즉 비인격화의 위기다. 마음 깊이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 같다는 느낌. 이때 결여된 것은 '인정', '중요함', '보임'이라 부르는 개념이다. 즉 주변 사람들로부터 감정적으로 이해받으며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인식이 아니라, 타인에게 무의미하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로 느껴지는 상태다.

탈인격화 위기는 관심의 공급과 수요 양측에서 발생한 변화 때문이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지속적인 급류 속에서 익명성은 오랫동안 근대성의 유혹이자 저주였지만 요즘은 우리를 급기야 숫자로 느끼게 한다.

탈인격화에 시달리는 ‘상처 입은 채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투명인간이 된듯한 느낌은 여러 나라에서 노동 계급의 분노를 부채질하고 트럼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동 계급과 빈곤층이 더 큰 투명성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타인의 데이터 수집 대상이 되거나 챗봇 및 AI 에이전트와의 표준화된 상호작용에 노출되는 현상은 계층의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해당된다. 비인격화는 우리 모두를 찾아왔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존중이나 존엄을 추구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 예외에도 불구하고 '보여지길 갈망하는 마음'은 보편적 현상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분명히 낙담스러운 일이며 고립감에 빠뜨릴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는다고 느끼는 증거가 있으며, 이는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비상사태이자 무명자들의 위기다.

최근 저서 『마지막 인간 직업』(2024)을 위한 연구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연결하기 위해 하는 일을 살펴봤다, 많은 이들이 '상대방을 보는 행위' 또는 '연결 노동'이라 부르는 어떤 형태를 활용해 가치 있는 결과를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성 질환 관리 돕기부터 에세이 작성법 가르치기까지 그 범위는 다양했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정서적 대상은 세심한 관찰과 심층 대화가 아닌 무엇으로 대처할 수 없다. 심층 인터뷰를 포함해 많은 인간적 업무를 AI가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시대에, 인간성을 효과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존재는 역시 인간이다.

비인간화 위기는 어디서 비롯될까? 많은 이들에겐 기술일 것이다. 스크린에 대한 집착이 서로를 바라보는 능력을 방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비인간화의 주요 원인은 개인을 데이터로 축소하는 광범위한 경향이다.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은 클라이언트, 환자, 학생, 심지어 노동자로서 반복적으로 표준화된 상호작용을 경험할 때 일어난다. 

이는 돌봄 직업군에서도 증가하는 추세다. 병원과 기업들이 예측 불가능하거나 비효율적이지만 노동자와 고객을 인간다운 느낌이 들게 하는 복잡한 상호작용이나 창의적 기여를 기계적으로 체계화하려 한 결과다.

군대나 기타 대규모 기관처럼 지나치게 표준화된 환경에서 생활할 때도 비인격화가 발생할 수 있다.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과 인식되는 방식, 심지어 존재 자체가 인지되는지 여부를 형성하고 차단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온라인 공간에 참여하는 방식이 그 영향력에 기여한다.

지금 소셜 미디어는 연결보다 오락 수단으로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비인격화는 타인의 게시물을 끝없이 스크롤하며 지나치는 데서 비롯될 수 있다. 이땐 경험에 대한 관객에 불과하며, 목격하면서도 결코 목격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비인격화의 근간이 되는 이러한 경향들-상호작용과 맥락의 표준화, 분열된 공동체 내 소외된 이들의 배제, 영원한 관객을 위한 스크린 시간의 확산은 균등하게 분포되지 않는다. 고객, 환자, 학생, 노동자로서 가진 이점이 적을수록, 환경이 더 표준화될수록, 편견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배제될 가능성도 커진다.

우리는 '관찰받는 자'와 '관찰하는 자'로 나뉜다. 비인간화 경향들은 합쳐서 보이지 않는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냈다. 비인격화 위기를 야기한 주역 일부가 그 ‘해결책’의 판매자들이다. 한때 페북 통한 세계 연결을 선전했던 저커버그는 이제 AI 동반자로 연결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 호객한다.

화면은 주변 사람과의 완전한 교감 방해하지만, 동시에 멀리 있는 관계는 강화하기도 한다. 소셜 미디어는 일종의 '소셜 스내킹snacking'이 되어 짧은 연결을 통해 사용자가 진짜(장기적 또는 대면) 사회적 상호작용의 부재를 더 오래 견딜 수 있게 한다.

소셜 미디어는 연결감을 주면서 동시에 단절감을 느끼게 한다. 패스트푸드 간식의 채워지지 않는 칼로리처럼, '소셜 스내킹'은 연결에 목마른 이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것 찾게 만든다. 이 플랫폼의 억만장자 소유주들은 외로움 위기 부추겨 지속되게 만든다. 위기를 팔고 그 해결책으로 이익을 얻는다. 외로움의 상인이 되었다.

기계화된 관계는 점점 더 많은 데이터와 기술의 개입을 부른다. '개인화' 전략은 점점 더 정밀한 맞춤화를 수반하는 과정이다. 데이터를 활용해 개인의 건강 기록, 운전 습관, 심지어 땀 성분까지 분석한다. '맞춤형 의료'와 '맞춤형 교육'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과 유사하지만 누구가 아닌 기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챗봇이 교육, 치료 제공, 의료 조언, 질적 인터뷰 위해 설계되고, 각 분야에서 인간보다 우수하다고 주장된다. 사람들도 봇이 편리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인간보다 덜 비판적이고 때로는 더 따뜻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상대적 열세는 모든 시간 제약과 효율성 압박을 반영한 결과다. 인간은 사람으려 상대하기엔 너무 바쁜 반면 기계는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의료진의 무례나 무시 문제는 실무자들이 일을 제대로 할 시간을 더 주는 것보다  기술적 해결책을 쉽거나 저렴하다고 포장해 판다.

공감형 챗봇이 급속히 확산되는 이 혼란스러운 지금, 기계가 타인을 바라보는 일을 대신할 수 있고 그 미진함은 곧 해결될 문제라고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앱 유지율 급락 문제로 고심하는 엔지니어들이 알다시피, 인간은 판단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인간의 의견에 관심이 있다.

기계가 우리를 '본다'고 할 때 상대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기계는 사람들의 판단에 대한 우려를 줄이지만 동시에 의견에 대한 관심도 줄인다. 여전히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청자‘다.

로봇이 언젠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해낼 것이다. 가령, 교육 분야에선 과제 채점이나 교재 관련 질문에 답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로봇이 아무리 비위를 잘 맞춘다 해도 당신을 자랑스러워하게 만들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설령 기계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다 해도 우리가 굳이 왜 그걸 원하느냐는 것이다. 기계가 미묘한 뉘앙스나 표정 같은 걸 포착할 수 있다 해도 우리가 왜 그걸 원해야 하는가? 그런 기술로 누군가 돈을 벌게 하려고? 거대 산업이 계속 번창하게 하려고?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나?

타인을 마주하는 것은 우리가 연결을 경험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나아가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를 기계화하려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비인간화 위기는 오히려 인간의 개입이 절실한 사회적 병폐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의 작위 혹은 부작위의 결정이 AI와 연결 노동의 앞날을 좌우할 것이다.

AI는 엄청난 가능성의 새 시대를 열었다. 병원 내 항생제 내성균 퇴치법, 지진 예측법, 향유고래의 언어 해독법 등 해결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문제들을 AI로 해결할 수도 있다. 때로는 마법 같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AI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그렇게 바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AI는 치료부터 교육, 의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대역으로까지 적극 활용되고 있다.

AI가 야기하는 심각한 문제는 잘 알려져 있다: 가장 흔한 비판은 알고리즘 편향, 감시와 사생활 침해, 일자리 상실 등이다. 이 모든 우려는 타당하다. 그러나 흔히 간과하는 것이 있다: AI가 인간 관계, 즉 교육과 상담, 일차 진료 같은 감정적 대인관계적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사람들 간 연결에 미치는 부적정 영향이다.

사회정서적 업무를 기술 대체물로 돌리는 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연결 노동 인력의 급감; 봇을 통한 과제 수행으로 인한 교육의 파괴; 개인적 연결 노동이 사치품이 되는 인간 접촉의 극단적 계층화; 시민 생활의 기반인 인간 간 유대감의 상실 등.

이런 문제를 AI로 해결하려는 엔지니어들은 개별 환자, 고객, 노동자에게 초점을 맞추기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관계에 대한 함의를 외면함으로써 비인격화 위기를 치료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다.

비인간화 위기를 해결하려면 그 근본 원인인 기술적 표준화, 배제, 스크린 사용 시간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기계적 인식에 굴복하기보다 사람들이 서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을 가꿔가야 한다.

가령,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만남을 각본화하는 대신, 의료진이 제대로 된 돌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인력 양성 및 투자에 힘써야 한다.

누가 주목받고 누가 관객에만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한 불균형도 해결해야 한다. 이 역학 관계를 뒤집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얼마나 불확실한 상태인지, 심지어 타인의 집중을 받을 자격조차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무력화된 상태로 내면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구제하려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듣기 위한 문화적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의료나 교육 분야와 같이 이런 이야기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직종에 취약 계층 출신의 인재를 양성하고 채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식의 기계화를 막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시대에, 기술 산업이 모든 비판을 '진보에 대한 반대'라는 비난으로 맞서는 상황에서, 자칫 이 분야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기술의 어떤 활용은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활용은 억제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연결의 기준'을 도입할 수 있다. 기술이 인간 관계의 연결을 얼마나 대체하거나 방해하거나 가능하게 하는지로 평가하는 방식이다.

비인간화 위기는 우리에게 그런 종류의 경계를 요구한다. 우리의 사회적 건강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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