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의 결별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7-09 17:35
'읽기의 종말이 다가왔다'
이런 제목의 글을 미국 시사문화 잡지 애틀랜틱이 최신호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인류 역사에서 누구나 글을 읽고 쓰는 문해력의 시대가 저물고 '문해-이후postliterate'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 사회의 데이터와 사례를 두고 내린 진단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 발췌해도 꽤 긴 글인데 읽고 생각해 볼 만한 점들이 많다.

원문: The End of Reading Is Here
   
전설에 따르면 2,300년 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세 왕은 궁정 고문에게 전 세계 저작물을수집하라고 지시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인류의 모든 지식을 보존할 도서관을 구상했다. 후계자들은 사명을 이어받았다. 왕실 군대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는 모든 배를 수색해 두루마리를 찾아내 아리스토텔레스 리케이움 본떠 지은 뮤즈의 성소인 ‘무세이온’에 보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서적 컬렉션도 소장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 대부분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이 근대 이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들이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왕은 학자들에게 급여를 주고 도서관에서 거주하며 연구할 수 있게 했다. 한 그리스 수사학자는 “공부에 열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장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고, 이는 도시 전체가 지혜를 얻도록 장려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 둘레를 계산하고, 제노도토스가 호메로스 서사시 초판 원고를 편집한 곳도 이곳이었다. 기하학 저서를 집필한 유클리드도 이곳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학문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기 400년 도서관은 사라졌다. 많은 학자들은 이 도서관의 파괴를 역사상 가장 큰 지식의 상실이자 암흑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역사가들은 수세기 동안 파피루스 조각들을 분석해 왔다. 전통적 원인은 전쟁이었다.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포위전 때 카이사르가 불을 질러 적어도 4만 권 두루마리가 소실되었다. 도서관은 규모가 축소된 채 4세기까지 존속했으나, 그해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추종자들이 남아 있던 원고들을 보관하던 이교 사원을 약탈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훨씬 더 평범한 소멸 원인인 ‘부주의’를 주된 원인으로 꼽는 경향이 있다.
   
장서 관리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습기, 쥐, 곤충들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갉아먹었다. 필사자들은 오래된 텍스트가 훼손돼 읽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끊임없이 베껴 써야 했다. 결국, 도서관 보존 의지보다 유지에 따른 어려움이 더 커지게 되었다. 고전학자 로저 배그널은 “도서관의 소멸이 암흑기를 초래한 것도 아니고, 도서관이 살아남았다고 그 시대가 더 나아졌을 거라는 뜻도 아니다”라고 썼다. 도서관이 사라지게 내버려 둔 사실이 암흑기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약 2,000년이 지난 지금 완전히 다른 상황 속에서 어둠이 다시 짙어지고 있다. 한때 자랑스러운 문명 사회의 일원이었던 미국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덜 읽는다. 국립예술기금에 따르면, 2022년에 어떤 책이든 읽었다고 응답한 성인은 절반 미만이었다. 소설이나 단편 소설을 읽은 사람은 38%에 불과했다. ‘미국인의 시간 사용 조사’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취미가 독서인 비율은 2004년 28%에서 2023년 16%로 떨어졌다. (이 연구는 책, 잡지, 신문, 오디오북, 전자책을 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도박은 독서보다 더 흔한 여가 활동이 되었다. 지난해 미국인의 57%가 도박을 했다.
독서 감소 현상은 연령대, 성별, 교육 수준을 불문하고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독서를 가장 많이 해 온 계층인 은퇴자, 여성, 대졸자들도 독서율이 급감했다.
   
읽는 책들은 예전보다 더 단순해졌다. 요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의 문장들은 1세기 전보다 약 3분의 1 정도 짧다. 문장의 길이가 질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 긴 문장이 흔했던 사실은 진지한 문학 작품을 읽을 의지와 능력이 있었음 뜻한다. 1958년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영역본의 문장은 다음과 같이 길고 복잡했다:
“산속의 그 따뜻하고 회색빛이 감도는 아침, 지바고는 차르가 안타까웠고, 그토록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태도가 억압자의 본질적인 특성일 수 있다는 생각, 그토록 약한 사람이 사람을 감금하고, 교수형에 처하거나, 사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반면, 지난해 베스트셀러 소설 1위는 청소년 소설인 헝거 게임 시리즈 최신작 <Sunrise on the Reaping>이었다. 청소년 소설이 성인들 사이에서 인기다. 베스트 10에는 아동 도서도 있다. 성인 독자 대상 소설로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은 로맨타시 모험 소설 Onyx Storm이었다.
   
이런 변화를 흔히 ‘문해력 위기’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의 기본적인 읽기 능력이 저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사이 4학년과 8학년 학생들의 읽기 성적은 하락세를 보였다. 학생들의 읽기 수준이 낮아짐에 따라 도서관 사서들은 새로 책을 구입해야만 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 중에 그래픽 노블이 있다. 초등학생을 위한 시리즈 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고전 작품이나, 중·고생을 위한 만화 등이 대표적이다.
   
2024년 전국 시험에서 고교 졸업반 학생 중 35%만이 복잡한 소설의 주제를 분석하거나 작가의 논증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등의 기술에서 ‘숙련’ 수준을 보였다. 비슷한 비율의 학생들이 ‘기본’ 수준에 미달했는데, 이는 텍스트에 명시적으로 포함된 개념에서 결론을 도출하거나 문맥 단서를 활용해 생소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인 문해력 점수도 낮아졌다. 성인의 30% 가까이가 여러 쪽에 걸친 텍스트를 자기 말로 재구성하거나 추론할 수 없다. 2017년에는 그 비율이 20% 미만이었다.
   
사실 미국인들은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단어를 읽고 있을 것이다. 바뀐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메일, 문자, 소셜 게시물, 레딧 스레드, 인스타 캡션 등을 수시로 접한다. 이런 단편적 텍스트의 폭증은 풍부하고 복잡한 정보를 전달하는 긴 글에 지속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을 해친다.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할 능력을 잃게 된다. 단어 읽는 법을 잊는다는 게 아니다. 이해와 종합 같은 고차원적 능력을 잃어간다는 뜻이다. 미국은 문맹이 아니라, ‘문해력-이후(postliterate)’ 상태인 것이다.
   
상황은 곧 더 나빠질 것이다. 속도도 빠를 것이다. 다음 세대는 지금 성인들이 어렸을 때보다 훨씬 덜 읽는다. 유치원 교사들은 많은 학생들이 동요나 동화를 모른다고 말한다. (미국 성인 23만6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평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사람은 2%에 불과했다.) 1984년에서 2025년 사이, 재미로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답한 13세 청소년 비율은 8%에서 29%로 증가했다.
   
청소년은 나이를 먹을수록 독서를 좋아하는 정도가 줄어든다. 최근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심층 면접조사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독서를 낯선 습관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심지어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층의 일부도 독서를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얼마 전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읽기 과제물이 어렵다고 불만을 표한 일이 있었다. 미국 최고 엘리트 대학에 다니며 글로 기록된 관찰과 논증, 분석에 뿌리를 둔 학문 분야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발췌문이나 요약만으로는 원문의 깊이와 정교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해야 했다. 이제 일부 학생들은 독서를 지식 습득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여긴다.
   
독서의 쇠퇴를 개탄하는 것을 잡지사의 이기주의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들은 글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독서는 단순한 기술이나 수많은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형성한다.

초기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음성으로만 소통했다. 읽고 쓰는 능력의 출현은 사회를 뒤바꿨다. 사람들의 의식과 정치, 그리고 그들이 이룰 수 있는 지적 성취까지 바꿔놓았다. 독서의 쇠퇴는 이런 규모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생각, 사회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문명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독서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에겐 문자로 글을 엮고 이를 현실 세계의 대상과 연결하도록 타고난 인지 기전이 없다. 읽기 위해 사람들은 말하기와 사물 인식에 사용되던 뇌 영역을 다른 용도로 전환해야 했다. 이런 시도는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후 수천 년까지도 대다수는 문맹이었다. 문해력은 구텐베르크가 1440년에 인쇄기를 발명한 뒤 비교적 최근에야 대중적 현상이 되었다.
   
글은 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은 메시지를 전달자와 분리시켜, 말 중심 사회에서는 불가능했던 보다 객관적인 정보 확산을 가능하게 한다. 글은 말보다 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고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글은 말보다 더 복잡한 문장 구조와 어휘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글은 말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다. 글은 다시 돌아가 새로운 의미와 이해를 깊이 탐구할 수 있다. 글은 오래 남기에 기억의 부담에서 정신을 해방시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어떤 단일 발명품보다도 글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월터 J. 옹은 문해력이 내적 집중, 지속적 주의력, 논리적 추론의 토대를 마련한 결과, 새로운 유형의 합리적, 선형적, 분석적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문해력을 습득하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읽는 능력을 넘어, 논리적이고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얻는 것이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사고 방식이 읽기 능력만이 아니라 문해 사회의 다른 측면들에서 기인한다고 봤다. 그러나 옹의 더 광범위한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인쇄 문화는 길고 체계적인 논증을 중시한다. 닐 포스트먼은 1985년 이렇게 썼다. “글쓰기는 말을 고정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가, 논리학자, 수사학자, 역사가, 과학자, 즉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언어를 눈앞에 두고 살펴야 하는 모든 이들을 탄생시킨다.” 읽기와 쓰기의 출현은 철학, 현대 과학, 학문으로서의 역사, 미술 비평의 전제 조건이었다.
   
문해력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면서 정치적 격변과 혁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식민지 미국에서는 독립 운동가들이 신문과 팸플릿으로 반영 정서를 고조시켰다. 미국의 건국 아버지들은 인쇄물로 새 국가를 세웠고, 시민을 정보를 갖춘 독자로 상정했다. 프랭클린은 신문 발행인이었으며 미국 최초 대출 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도서관들은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대화 수준을 높였으며,” “평범한 상인과 농부들을 다른 나라의 대다수 신사들만큼 지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썼다. 미국인들은 건국 초부터 정보 습득을 시민적, 심지어 도덕적 의무로 여겼다.
   
물론, 신생 공화국은 많은 흠결로 얼룩졌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문을 통해 적들을 공격했고, 대중 선동을 위해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독서의 기회도 균등하지 않았다. 백인 우월주의 정부는 흑인의 문해력 향상을 막았고, 특히 남부에서 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학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오락과 의미, 유대감의 중요 원천이었다. 성경과 영문학을 통해 공통의 참조 체계를 공유했다. 19세기에는 편지 쓰기가 예술의 형식이었고, 연애 편지조차 우아하고 격식 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1962년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한은 서구 세계가 ‘포스트-문자 시대’로 접어들 거라고 예측했다. 그해 출간된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그는 그런 시대가 이미 시작됐며, 전자 매체가 이미 문자를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가구의 90%가 텔레비전을 보유했는데 10년 전의 9%에 비해 급증한 수치였다. 텔레비전은 미국인들의 주요 정보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보통 가구는 하루 5시간 이상 텔레비전 앞에서 보냈다.
   
지금 기준에서 1950년-60년대 미국은 ‘문해-이후 사회’로 보이지 않는다. 전후, 미국은 놀라운 속도로 더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도 높아졌다. 글에 대한 갈망과 이를 창조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존경은 커져만 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TV는 미국인의 생활 리듬과 습관을 바꾸고 있었다. 1985년 닐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에서 TV가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고 정치를 저급한 오락으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TV가 재미를 준다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재미있는 걸로 제시된다는 점”이라며 “TV는 우리 문화가 자신을 인식하는 주된 방식”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평균적인 미국 가정의 TV 시청 시간은 하루 7시간이 넘었고 2010년 9시간 가까이로 늘어났다.
   
독서에 필요한 ‘침묵의 시간’을 TV가 잠식했다면, 광대역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얼마 전까지도 가정 내 화면 기반 오락물은 한정돼 있었다. 그런 환경에선 책도 경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일부는 잠들기 전 TV를 끄고 책을 읽곤 했다.
   
이제 오락물은 무한하다. 사람들은 폰을 손에 쥔 채 TV를 보며,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거나 문자를 주고받는다. 넷플릭스는 시청자의 주의 산만을 가정하고 붙들어 두기 위해 전략적으로 극을 만든다. 이런 환경에서 책을 읽기 위해선 정말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글을 읽더라도 이해력이 예전 같지 않다. 특히 폰으로 읽을 때 더 그렇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크롤, 하이퍼링크, 알림 등은 피상적인 읽기를 유도하며 끊임없이 딴 곳을 보도록 유혹한다. 실험해 보면 디지털 기기로 읽을 때 종이보다 이해도가 더 낮다.
   
이제 텍스트에 오래 온전히 집중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오디오북이 종이책의 대안으로 떠오른 데에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때문이기도 하다.
   
짧아진 지문과 피상적인 독서 추세에 학교는 저항한 게 아니라 일조했다. 2025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고 영어 교사 대다수가 연간 과제물로 내준 책은 0~4권이었다. 객관식 독해 시험에 맞춰 책 전부보다 짧은 지문을 읽게 했다. 학교 교육 과정의 상당수는 발췌문에 의존한다.
   
미국 교실은 디지털 기기가 휩쓸고 있다. 뉴욕타임스 설문조사에 따르면, 초등 교사 80% 이상이 학생들이 유치원 입학 때쯤이면 학교에서 지급한 기기를 받게 된다고 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에서 뭔가 읽곤 했지만 양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때 텍스트 위주였던 소셜 미디어는 이제 짧은 동영상으로 넘친다. 틱톡, 숏츠, 릴스가 특히 젊은 층 중심으로 주의를 장악하고 있다.
   
최근 분석에 따르면, 8학년이 되면 하루 평균 4시간 반을 소셜 미디어에 쓴다.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이 동영상 시청이고 종종 2배속 재생이다. 이젠 문자 메시지도 구어체다. 감정을 강조하느라 대문자만 사용하고, 문장 부호의 형식성을 피한다. 많은 20대는 문자 대신 음성 녹음 메시지를 선호한다.
   
글은 수천 년 간 신기술의 도전을 극복해 왔다. 글은 분명 탄력적이다. 독서율은 변할 수 있지만, 낙관론자들은 역사의 긴 흐름이 보편 문해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역사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연구해온 하버드대 마틴 푸크너 교수는 독서의 종말론에 회의적이었다.
   
그런 그도 이제 종말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다고 본다. 영상에서 벗어나 텍스트로 회귀하는 일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어쩌면 맥루한과 포스트먼의 ‘문해-이후 사회’ 예측은 틀린 게 아니라 너무 앞섰을 뿐인지도 모른다. 반세기 전 예견했던 세상이 이제 우리 앞에 펼쳐졌다. 문해 시대는 구전 시대와 디지털 시대 사이의 짧은 과도기로 남게 될 것이다.
   
독서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독서의 소멸은 사고방식을 재구성할 것이다. 인지과학자들은 이런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열두 명의 인지과학자에게 우리가 독서를 중단하면 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물었다.
   
신경과학에서 가장 확고한 연구 결과 하나는 사람의 뇌는 연습한 것을 숙달한다는 사실이다. 글을 읽는 대신 숏츠로 시간을 채운다면 우리의 읽기 능력은 퇴화한다. 이해력을 돕는 배경 지식이 줄어든다. 갑작스런 대규모 문맹 사태가 일어나진 않더라도 독서가 길러주는 복잡한 인지 능력은 서서히 퇴화하기 시작한다. 마음속 도서관은 방치돼 낡아진다.
   
읽기는 집중력을 단련하는 운동과 같다. 많이 읽을수록 읽기가 쉬워지고 새로운 이해를 통해 더 큰 보상을 얻는다. 결국 그 과정은 어려움에서 즐거움으로 바뀐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읽는 양이 줄어들수록 읽기는 더 어려워지고, 지식 습득의 길은 더 험난해진다.
   
소셜 미디어는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틱톡 스크롤은 실험실 쥐가 버튼을 눌러 코카인을 투여받는 것과 같다. 버튼만 누르게 된다. 실험에서 2004년 화면에 집중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은 2분 30초였다. 2012년 75초로 떨어졌다. 5년 전엔 47초였다.
   
동영상 시청은 독서보다 더 수동적이다. 3~5세 어린이들이 다양한 형식의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뇌 영상을 촬영했다. 정지된 삽화를 보며 오디오를 들을 때보다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시청할 때 아이들은 상상력 관련 뇌 영역의 절반 정도만 사용했다. 또한 학습 관련 영역인 소뇌도 덜 사용했다. 화면 속에서 직접 상황이 펼쳐지기에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동영상은 텍스트보다 더 많은 정보, 즉 언어 이외 소리와 움직이는 영상까지 담고 있음에도 더 깊은 사고는 자극하지는 못한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내기에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청자의 이해 정도와 상관없이 화면은 계속 바뀌기만 한다.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하거나 되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젊은이는 숏츠 없는 세상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화면 시청 시간이 길고 독서 시간이 짧은 어린이의 뇌는 실행 및 언어 관련 영역 백질 발달이 미진하다. 입학해서도 집중력 유지 능력이 부족하고 정신적 노력에 대한 내성이 낮다. 정보를 찾거나 해독하는 능력은 있어도, 추론이나 종합, 혹은 긴 글 전반의 아이디어를 머리에 담아둬야 하는 이해력은 모자란다.
   
2024년 3~8학년 교사들 설문조사에서 80% 이상이 학생들의 독서 지속력이 2019년 이후 감소했다고 답했다. ACT 시험의 독해 및 영어 영역 점수는 지난 7년 계속 떨어져 현재 30여 년 만에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SAT 독해 및 작문 점수도 하락세다. 지문을 짧게 줄이고 단순화했음에도 그렇다.
   
이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교수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법, 즉 사고하는 법의 기본을 가르쳐야 한다. 고등 교육은 보충 교육 성격이 더 강해질 게 거의 확실하다. 
   
학생들이 글 속의 낯선 표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학생들에게 인터넷 이용 기회가 주어져도 이해 못하는 내용을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조차 모르거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대학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성인들이 논리 문제에 답하고, 효과적으로 추론하며, 패턴을 분석하는 능력은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추락했다. 반세기 전 같은 교육 수준 사람에 비해 어휘력이 더 부족하다. 1930년대 이후 IQ가 꾸준히 상승해 온 ‘플린 효과’가 지난 20년 사이 역전되었다. 평균 IQ 점수는 10년마다 약 3점씩 떨어지고 있다.
   
이런 인지적 변화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문자 문화’는 우리가 아직 이해 못하는 이점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출현이 “학습자들의 영혼에 망각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미디어 이론가 안드레이 미르가 지적했듯이, 글쓰기는 개인의 기억은 약화시켰지만 사회의 집단적 기억은 향상시켰다.
   
끝없는 영상 콘텐츠에 뇌가 묶여 자라나는 세대는 새로운 종류의 뛰어난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독서의 쇠퇴가 덜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정교한 사고 방식을 불러오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속에서 어떤 장점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1982년 월터 옹은 현대 문명이 ‘2차 구술성orality”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고 했다. 한때 문자를 사용하던 사회가 문자 이전 문화로 돌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말은 발화 즉시 사라지기에 구술 문화는 기억을 돕기 위해 반복을 중시한다. 구술 사회의 시인들은 사고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상투적인 표현과 기억법을 활용한다. 그들은 “수식어”와 “신체적 폭력에 대한 열광적인 묘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냉정한 토론보다 갈등이 더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처럼 수정할 수 없기에,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간다. 자신의 이전 말과 모순되는 말을 하더라도 청중이 이전 발언을 기억 못할 걸로 여긴다.
   
트럼프의 소통 방식은 구술 사회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는 기억하고 반복하기 쉬운 별명을 사용한다. 마치 이전 발언의 기록은 없는 것처럼 스스로 모순된 말을 한다. 그의 글조차 연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실제로 쓰는 것보다 받아쓰기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의 온라인 게시물 상당수가 텍스트는 거의 없는 밈이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문해-이후’ 대통령이다. 정보가 주로 글로 전달되는 나라에서 그런 인물이 지도자로 선출될 걸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주의가 산만하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를 악용하는 소통 방식을 개척했다. 그는 이 시대의 수사적 혁명가다.
   
1985년 출간된 책 <No Sense of Place>에서 미디어 이론가 조슈아 메이로위츠는 텔레비전과 전자 매체가 미래 지도자에 대한 새로운 유형의 정보를 쏟아부었다고 지적했다. 인쇄 매체는 대중에게 정치인들의 다듬어진 발언만 제공했지만, 영상은 대통령의 이런저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했다. “오늘날 권력자는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외모와 말솜씨가 좋아 보여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는 인쇄 매체의 쇠퇴와 전자 매체의 부상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포퓰리스트 지도자 쪽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들은 권위와 제도를 외면하고 TV에 잘 나오는 후보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배우 출신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할 무렵의 이야기다.
   
소셜 미디어는 대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복잡성, 미묘한 뉘앙스, 엄밀함보다는 단순하고 선동적이며 감정에 호소하는 콘텐츠를 우선시한다. “모든 지도자는 똑같이 부패했다,”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뺏는다”, “그 문제는 쉽고 상식적인 해결책이 있다”와 같은 대중적인 정치 구호가 해당 분야 전문가들 연구 결과보다 우위를 점한다.
   
좌우 정치인 모두 이런 플랫폼 활용법을 알아냈다. “적을 지목하면 대중을 양극화시킬 수 있다” “권력 투쟁에서는 미묘한 뉘앙스는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뿐이므로, 미묘한 차이를 허용해선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선 제도와 엘리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더 유리해진다. 카리스마 있는 한 사람만 있으면 시각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교양 있는 국민이라면 꿰뚫어 보기를 바랐던 바로 그 선동가 유형이다. 이제 그 반대편에 이르렀다. 맥루한은 “자유주의 세계는 정의상 문해력이 있는 세계”라고 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인 듯하다.
   
트럼프가 최초의 ‘문해-이후’ 대통령이라면 끝이 아닐 것이다. 요즘 후보자들은 매일 콘텐츠 제작에 집중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모든 아이디어는 화면에 중독된 유권자들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짧게 압축해야 한다. 인스타 게시물이나 10초짜리 틱톡 영상으로 전달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문해력이 퇴화된 시대의 좋은 선거 전략이지만 정보에 입각한 자치 정부를 염두에 둔다면 재앙을 예고한다.
   
아직 AI는 언급도 안 했다. 수많은 디지털 기술이 사람들 주의를 빼앗아 깊이 읽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AI는 글쓰기 존속을 위협하는 첫 번째 도구다.
   
글쓰기는 어렵다. 오웰은 그 경험을 “고통스런 병을 오래 앓는 것”에 비유했다. AI는 간단한 해결책을 약속한다. 문제는 글쓰기가 그저 완성된 생각을 옮겨 적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글쓰기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파악하고 그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글쓰기 과정에서 질서 정연하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흐릿한 생각과 허술한 추론이 드러난다. 생각을 단어, 문장, 문단으로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집중력은 새로운 연결점을 만들고 새로운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글을 쓰기 위해 빈 페이지를 마주하는 일은 엄청난 두려움을 주지만 그 분투 속에는 깊은 만족감이 있다. 쓰는 과정은 미완성된 생각을 다듬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이해를 얻는 방법이다. 내 주장을 평가하고 설득력이 없는 것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설득력 있는 주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글쓰기가 힘든 이유는 배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AI가 그 어려움을 없앤다면 배움 또한 사라진다.
   
AI를 이용해 글을 쓰면 과정은 더 쉬워진다. 결과물도 스스로 작성한 것보다 나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정신적 발달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른다. 브라질의 한 연구에 따르면, AI를 이용해 공부한 학부생들 성적이 AI 없이 공부한 학생들에 비해 깜짝 시험 점수가 뚜렷하게 낮았다. 영국의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인지 과제에 AI를 빈번히 사용하는 것과 비판적 사고 능력 간에는 부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다.
   
현대 생활에는 지루한 작문이 많이 요구된다. 일부는 손쉽게 기계에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한 가지 문제를 자동화해 해결하다 보면 거의 매번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이메일만 해도 팩스, 전화, 회의를 대체할 편리한 수단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국 이메일 답장만으로도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게 되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들은 결국 지적 생활을 변화시킨다.
   
상당수가 글쓰기를 피해 AI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깊은 사고력은 점점 희귀해지는 만큼 중요성도 커질 것이다. AI로 인해 텍스트는 넘쳐난다. ChatGPT가 출시된 2022년 이후 아마존의 월 출간 도서 수는 3배로 뛰었다. 같은 기간 과학 저널 투고 논문 수도 급증했다. 그중 상당수는 적어도 일부는 AI가 작성했을 테다.
   
AI는 간결하고 전문적인 문장을 만들어 내다. 문학 석사 과정 학생들조차 기계가 쓴 글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동시에 AI 글은 독창성이 부족하거나, 종종 부정확하거나, 혹은 둘 다였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분별력과 이해력은 더 중요해졌다. 자신이 뭘 생각하는지, 어떻게 스스로 판단할지 알아야 한다. 바로 이런 능력이 AI 사용으로 인해 약화될 위험에 처해 있다.
   
위험에 처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그 자체다. AI 작문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자기 견해를 심도 있게 탐구하거나 발전시키는 능력마저 잃을 수 있다. 그런 능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지금의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126년 전 더 애틀랜틱은 아서 리드 킴볼이 쓴 “현대 미국 생활에서 가장 심각하면서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변화 중 하나”를 묘사한 에세이를 실었다. 국민들이 글을 잘 쓰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신문이었다. ‘저널리즘의 침공’에서 킴볼은 스포츠 면과 가십 칼럼, 잡다한 기사와 속어가 난무하는 일간지가 책과 문학 잡지의 위상을 잠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워싱턴이나 유럽의 시급한 사건을 알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가장 먼저 “흥미로운 ‘기사’, 기이한 자전거 모험 이야기나, 영리한 도둑의 체포 소식 같은 것을 찾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문이 등장하기 전에는 소설이 건전한 독서 습관과 도덕적 품격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토마스 제퍼슨은 여성 교육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로 소설에 대한 열정을 꼽으면서 ‘건전한 독서’에서 멀어지게 유혹한다고 했다.
   
어쩌면 126년 후 이 글은 그런 우려의 최신 사례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한탄들을 돌아보니, 구식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들이 대개 종말을 가장 빨리 예측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최소한 지표상으로는 책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다. 작년 종이책 판매량은 10년 전보다 더 높았다. 반스 앤 노블은 60개 이상의 신규 매장을 열었다. 2025년에는 거의 400개의 독립 서점이 생겨났다. 서브스택에서는 긴 글 구독이 폭증했다. 유명인들은 명성과 영향력을 활용해 북클럽을 출범시켜 성공했다. 오디오북은 10억 달러 규모 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낙관론자들은 데이터 속 중요 단서를 간과하고 있다. 바로 텍스트는 점점 줄어드는 인구 사이에서만 번창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읽힌 책의 80% 이상을 성인 20%가 소비했다. 독서는 이제 우표 수집이나 난초 기르기처럼 틈새 취미가 되어가고 있다.
   
읽는 사람은 20년 전보다 매일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할애한다. 그들의 독서 열정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높은 듯 보인다. 하지만 글에서 문화적 이해와 지적 유대감을 얻는 텍스트 애호가들은 이제 하위문화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거의 틀림없이 그 일원이다.
   
이제 책 읽는 사람은 정체성의 표지일 수 있다. 기차에서 누군가 읽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이런 선언은 온라인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공공장소에서 책을 너무 과시하면 ‘보여주기 독서’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사회가 구술 문화에서 문해 문화로 처음 전환했을 때,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들은 특권적 지위를 차지했고 그들의 지적 노동은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상주하던 학자들은 도시의 왕실 단지에 거주했다.
   
오늘날 독서는 다시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그 지위는 예전처럼 높지 않다. 오히려 주변부로 밀려나 조롱 받으며, 여러모로 무의미한 존재로 여겨진다. 대다수에게 글로 사는 삶은 경제적으로 막다른 골목이다. 신문사의 채용은 지난 20년 사이 75퍼센트나 줄었다. 인문학 분야 학계 채용도, 종신 재직이 보장되는 직위도 줄고 있다. 2024년 대졸생의 인문학 분야 학사 학위 취득 비율은 8%에 불과했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랑스레 ‘문해-이후postliterate’를 자처한다. 대통령은 요점만 나열된 브리핑 혹은 사진과 차트를 좋아한다. 세계 최고 부자들은 X 게시물, 팟캐스트, 챗봇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고 자랑한다. 부와 영향력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을 본받으려 한다.
   
문화·경제 권력은 가장 인기 있는 정보 기술을 능숙히 활용하는 이들에게 가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은 스트리머, 팟캐스터, 인플루언서들이다. 이들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동경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심지어 어떻게 말하는지까지 좌우한다.
   
예전에는 책이 지식, 기억, 지혜, 도덕성의 필수 원천이었다. 이전 세대에 의해 쓰여진 책은 문화의 수직적 전승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전해졌다. 이제 정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수평으로 이동한다. 독서의 쇠퇴는 세상을 뒤집어 놓지 않았다. 옆으로 기울게 했을 뿐이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엘리트의 반열로 단숨에 올려줄 직업을 원한다. 오늘날 그것은 인플루언서다. 2023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Z세대 응답자 60% 가까이가 가능하면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미국 학교 도서관은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팟캐스팅이 가장 인기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뭘 포기하고 있는지 깨닫고,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24개 주에서 수업 시간 중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했다. 댈러스의 한 학군에서는 전년 대비 도서관 도서 대출 건수가 20만 건 증가했다. 일부 교사들은 수업 중 발췌문 사용에 반대하며 교과 과정에 다시 책 전체를 포함시키고 있다. 어떤 지역 도서관에서는 어린 이용자들도 디지털 버전보다 종이책을 선호한다. 문해력 상실에 대한 이런 저항이 부질없어 보일지 몰라도, 끝까지 버티는 이들의 시도에 아무런 손해는 없다.
   
나는 문해력 상실 시대에 자랐다. 닷컴 버블 붕괴 직후 태어났고, 아이폰 출시 무렵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중1 때 첫 휴대폰을 받았고 곧장 인스타 계정을 만들었다. 인터넷에 관한 꿰고 있고, 독서를 전제로 한 세상에 대한 나의 지식 대부분은 책에서 나왔다.
   
책 읽는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큰 이점을 누렸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아빠는 거의 매일 밤 책을 읽어 주셨다. 언니들은 나를 북클럽에 끌어들일 날을 고대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The Boxcar Children이었는데, 버려진 기차 객차에서 집을 꾸려가는 네 명의 고아 남매 이야기다. 책 속에서 아이들은 먹을 것과 거처를 마련하기도 전에, 두 언니가 남동생에게 읽기를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나무 조각을 깎아 글자를 만들고, 블랙베리 즙을 잉크로 사용한다.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어린 시절 읽던 Rabbit Hill과 Johnny Tremain을 물려주셨다. 엄마가 책을 처음 받았을 때 표지 안쪽에 서명을 해 두셨는데, 내 서명을 추가했다.
   
고교 시절 나는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 선생님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들의 지식을 나눠갖고 그들이 언급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다. 제인 에어를 힘겹게 읽어 내려갔고, 안나 카레니나에 푹 빠져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혼자였지만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책에는 여러 세대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제임스 볼드윈이 말했듯이:
“자신의 고통과 비통함이 세계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과 저를 연결해 주는 바로 그것임을 가르쳐 준 것은 도스토옙스키와 디킨스였습니다.” 나는 마치 끊어지지 않는 지식과 문화의 사슬에 속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그 습관은 서서히 사라졌다. 변화는 미묘했다. 나는 점점 바빠졌다. 잠들기 전 책을 읽는 대신 휴대폰을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몇 페이지 읽다 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책을 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 진도를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책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 나중에 다시 집어 들면 될 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졌을 때 두루마리에 기록된 지식은 영원히 사라졌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유클리드가 또 어떤 글을 썼을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 텍스트는 흙먼지가 되었다. 오늘날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도서관의 모든 단어는 단 하나의 컴퓨터 칩에 저장될 수 있다. 요즘엔 가장 생소한 학술 전문서조차 스캔되어 디지털화된다. 구글 북스와 인터넷 아카이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규모의 도서관을 대표한다. 키보드 몇 번만 누르면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문헌들이 습기나 쥐의 피해를 입을 위험도 거의 없다.
   
하지만 무관심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바로 그 문헌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다.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정보와 지혜를 우리는 물려받았다. 이 유산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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