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델 베리(1934-2026)가 어제 눈을 감았다.
그의 책에서 한 단락을 옮겨와 여기에 이식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내 나름의 애도의 의례를 대신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사물에 대한 기계적 설명이 지배하고 있지만, 거기에 의거해서는 그러한(생명세계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이용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예견할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문화적 전통에 의거하려는 별 인기 없는 일을 감행할 때에만, 그러한 변화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희망은 늘 위급할 때마다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들로 다시 돌아가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내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한가지 문화적 유산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다. 지난 45년 동안 나는 여러번 <리어왕>에게로 돌아왔다. 이 희곡을 읽음으로써 내가-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정독한 모든 사람들이-배운 것은 여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한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스스로 거듭나 자신을 바로잡고,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 희망을 가지기 위한 모든 노력의 출발점은 늘 우리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역사가 우리를 데려다 놓은 그 지점에서부터만, 우리의 행위들이 축적된 그 지점에서부터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중략-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를 기계로 취급할 때마다 그것은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뒤집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살아 있는 유기체를 기계로 인식할 때마다 그것은 기계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다. 환원주의가 판치고 재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대해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도 똑같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보는 대로 세상은 당신에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당신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Blake, Complete Writings, Oxford, 1966, 663쪽)
삶을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또 알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결국 삶을 축소시키고 환원시키는 일이다. 한동안은 자유롭고 사려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그렇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어떤 이해의 '모델'을 사용하건 간에) 삶을 우리의 이해의 영역 안으로 축소시키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삶을 노예화하고 이용하며 팔아넘기는 것임이 불현듯 확실해졌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변화와 구원의 영역 밖으로 삶을 내모는 것이고, 절망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1장. 알지 못함' 중에서
아, 또 한 명의 지혜로운 사람이 떠났다. (사실 떠났다는 말은 거짓이다. 나는 그를 만난 본 적도 없으므로. 하지만 나는 글로 만났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떠났다는 말은 틀렸다. '문예 공화국'에 삶과 죽음의 국경선은 없다.)
이제 배움의 빚을 진 남은 자들이 즐겁게 여정을 이어갈 차례다. 그가 남긴 글과 대화하며. 그는 이런 순간을 예견한 듯 이런 글도 남겼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그 영속적이고 실체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우리 삶의 토대가 우리 눈에 선명히 드러나며, 우리는 필연과 신비의 조건 속에서 다시금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세상에서 깨어 있고 책임감 있는 모든 사람들-죽은 자, 살아 있는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까지-이 동시대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질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동시대성이다.
그의 책에서 한 단락을 옮겨와 여기에 이식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내 나름의 애도의 의례를 대신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사물에 대한 기계적 설명이 지배하고 있지만, 거기에 의거해서는 그러한(생명세계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이용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를 예견할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의 문화적 전통에 의거하려는 별 인기 없는 일을 감행할 때에만, 그러한 변화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희망은 늘 위급할 때마다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들로 다시 돌아가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내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한가지 문화적 유산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다. 지난 45년 동안 나는 여러번 <리어왕>에게로 돌아왔다. 이 희곡을 읽음으로써 내가-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정독한 모든 사람들이-배운 것은 여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한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스스로 거듭나 자신을 바로잡고,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 희망을 가지기 위한 모든 노력의 출발점은 늘 우리 자신의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역사가 우리를 데려다 놓은 그 지점에서부터만, 우리의 행위들이 축적된 그 지점에서부터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중략-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를 기계로 취급할 때마다 그것은 기계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뒤집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살아 있는 유기체를 기계로 인식할 때마다 그것은 기계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다. 환원주의가 판치고 재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대해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도 똑같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보는 대로 세상은 당신에게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당신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다.
(Blake, Complete Writings, Oxford, 1966, 663쪽)
삶을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또 알 수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결국 삶을 축소시키고 환원시키는 일이다. 한동안은 자유롭고 사려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그렇다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제는 (우리가 어떤 이해의 '모델'을 사용하건 간에) 삶을 우리의 이해의 영역 안으로 축소시키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삶을 노예화하고 이용하며 팔아넘기는 것임이 불현듯 확실해졌다.
그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변화와 구원의 영역 밖으로 삶을 내모는 것이고, 절망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1장. 알지 못함' 중에서
아, 또 한 명의 지혜로운 사람이 떠났다. (사실 떠났다는 말은 거짓이다. 나는 그를 만난 본 적도 없으므로. 하지만 나는 글로 만났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떠났다는 말은 틀렸다. '문예 공화국'에 삶과 죽음의 국경선은 없다.)
이제 배움의 빚을 진 남은 자들이 즐겁게 여정을 이어갈 차례다. 그가 남긴 글과 대화하며. 그는 이런 순간을 예견한 듯 이런 글도 남겼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있는 그 영속적이고 실체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우리 삶의 토대가 우리 눈에 선명히 드러나며, 우리는 필연과 신비의 조건 속에서 다시금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세상에서 깨어 있고 책임감 있는 모든 사람들-죽은 자, 살아 있는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까지-이 동시대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질 가치가 있는 유일한 동시대성이다.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그 작품이 속한 시기나 시대는 그 가치가 확립된 후에야 비로소 중요해진다. 훌륭한 시인이 우리의 동시대인이라는 사실은 특정 가능성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지만, 무가치한 시인의 동시대성은 우울감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중에는 동시대인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설령 그들이 남긴 작품이 가능한 최상의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오래된 글에서 얻는 인간 경험의 장구함, 실현 가능한, 혹은 입증된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우리에게 줄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단순히 출발점일 뿐 아니라, 교감하고 대화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연속성의 감각을 제거해 버리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무분별한 현재형뿐이다. 우리가 호메로스가 살았던 바로 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호메로스를 오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오해하게 된다. 과거는 우리를 정의하는 기준이다. 우리는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과거에서 벗어나거나, 그 안의 나쁜 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쓸 수 있지만, 더 나은 무언가를 더함으로써만 비로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약 내가 믿는 바와 같이, 전통의 기능 중 하나가 우리의 영원한 본성과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필요성 및 가치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전통이 없을 때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유행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럴 때 결국 우리는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삶을 살고, 유행을 끊임없이 진부화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상업과 산업의 ‘실용적인 사람들’의 예술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
/Wendel Berry, Standing By Words (1979)
/Wendel Berry, Standing By Words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