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6-19 21:08
외신 기사를 훑다가 '킬리만자로 등정'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12년 전 나도 그 곳 정상에 올랐던 일을 두고두고 잊을 수 없고,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선천성 희귀 유전병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고 살아온 남성이 두 손으로 5985미터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지금 내게 주어진 형태의 생명과 이만큼의 건강에 감사하며 그에 값하는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다. 발췌해 소개한다.

원문:  I climbed Mount Kilimanjaro on my hands

나는 다리가 없다. 그래서 해발 6,000미터에 가까운 봉우리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은 미친 짓처럼 보였다. 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혹독한 신체 훈련을 거친 끝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희귀 유전병을 앓고 태어나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다섯 살 때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부모님께 내가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일원이 되기는커녕 평생 앉은 자세를 유지하기도 힘들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고, 부모님은 나를 격려해 주시는 데 정말 훌륭하셨다.

나는 손으로 걷는 법을 익혀 세상을 헤쳐 나갔다. 휠체어도 있었지만, 와이오밍의 우리 동네에서는 다른 아이들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돌아다녔다.

유타주에서 대학을 다녔고, 2003년 커뮤니케이션 학위를 받고 끔찍한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고객 운영 부서에서 일했다. 하지만 더 깊은 삶의 목적을 갈망했다.

그러다 2008년 한 친구가 비영리 단체와 함께하는 케냐 자원봉사 여행에 나를 초대했다. 세계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는 국제 개발 활동을 직접 보고,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내 열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단체에서 동기 부여 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토론토로 이주한 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젊은이들이 변화를 만들어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내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나는 직접 해본 적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1년 그 단체의 설립자가 킬리만자로를 등반했다고 말하며, 내게도 도전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가 제정신인가 싶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정말 내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인 알렉스와 데이비드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의사들, 현지 등반 전문가, 개인 트레이너, 내 고용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나는 나의 등반을 통해 아프리카 동부 지역의 깨끗한 식수 공급을 위해 50만 달러를 모금하자고 제안했다.

1년 동안 모금 활동을 하고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훈련했다. 2012년 6월 우리는 탄자니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첫날 날씨는 좋았고 우리는 들뜬 마음이었다. 패딩 처리된 조정 장갑을 끼고, 등반 구간의 절반은 손으로, 나머지 절반은 휠체어를 타고 오를 계획이다. 하지만, 그 지형에서는 휠체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7시간 넘게, 얼굴에 먼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등반 구간의 80%를 손으로 올라갔다. 우리 모두 예상보다 훨씬 힘들다고 느꼈다. 둘째 날을 앞두고 긴장했다. 포터 두 명이 내 휠체어를 고리에 걸어 머리 위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치를 시험해 보았다. 처음엔 재미있었지만, 그들이 너무 빨리 걷는 바람에 내가 동료들보다 앞서 나가게 되니 기분이 별로였다.

다행히도 우리는 곧 리듬을 찾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우리는 오전 6시에 휠체어에 실려 출발했다. 그 후 가능할 때마다 나는 손을 짚고 알파인 사막을 지나 달 표면 같은 사막을 갔다. 6일째, 해발 5,895m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는 눈과 얼음이 있었고, 강풍이 불었다.

한 걸음 나아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더 두꺼운 장갑으로 갈아 신었다. 지형은 험했고, 경사는 가팔랐으며, 고도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동료들은 구토를 했다. 다행히 나는 괜찮았다. 우리는 내 키 때문이라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정상을 향한 날은 킬리만자로 능선까지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포터 한 명이 담요로 나를 감싸고 첫 구간 동안 자신의 등에 묶어주었다. 손으로 직접 이동하기에는 너무 위험해서였다.

나머지 구간은 기어 올라갔다. 정상에서 밤이 낮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는 기진맥진한 채 서로를 껴안고 울었다. 닳아서 갈아 낀 장갑이 네 켤레였다. 조부모님이 직접 만드신 와인을 마시며 지구의 곡선을 내려다보았다.

이번 등반은 많은 성찰의 순간을 선사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했는데, 이번 여정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이 경험은 내 직업 생활에도 도움이 되었다. 더 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일하던 비영리 단체가 문을 닫았을 때 나는 혼자서 일을 이어갔다. 장애인 정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게이이자 장애인으로서 겪는 힘들지만 종종 유머러스한 경험에 대한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45세에 내 몸으로는 다시 산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지만, 청중 앞에서 강연할 때마다 그 추억을 되새기곤 한다. 나는 그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도 현재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돕기 위해 책도 썼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 회복탄력성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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