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는 근대의 특징을 '마술로부터 풀려남Entzauberung, disenchantment'이라고 봤다.
현대인은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다. 과학은 적어도 원리의 면에서 '모든 것'을 설명했거나 설명해낼 기세이고,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그런 이야기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연일 뉴스를 뒤덮는 사건 사고는 놀라움의 개념도 감각도 무디게 한다. 아직도 '경이로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실리콘밸리에서 발표하는 '신기술'이나 고가 매장의 쇼케이스에서나 예상할 수 있는 '신상'일 뿐이다. 자극적인 스크린 속이 아닌 자연(이제는 명칭도 기계적이면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오프라인'으로 바뀌었다)을 온전히 느끼는 감각마저 무뎌져 간다. 끊임없이 시선은 화면을 훑고, 손끝은 스크롤링을 반복한다. 아, 세상은 불안 아니면 그것을 잊기 위한 자극, 아니면 무료함으로 가득하다.
과연 정말 그럴까. 포기할 수 없는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생각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에세이를 올린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용'과 '돌봄'으로 구분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되찾는 방법으로서 '매혹'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내용이다.
원문: Tolkien's Guide to Re-Enchantment
(아래 원문 발췌)
어떻게 하면 세상에 다시 매혹될(enchanted) 수 있을까. ‘매혹’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짓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에게 매혹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우리 스스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그 속에 참여하는 우리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었다. 과학은 적어도 원리의 면에서 '모든 것'을 설명했거나 설명해낼 기세이고,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그런 이야기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다.
연일 뉴스를 뒤덮는 사건 사고는 놀라움의 개념도 감각도 무디게 한다. 아직도 '경이로움'이라는 것이 있다면, 실리콘밸리에서 발표하는 '신기술'이나 고가 매장의 쇼케이스에서나 예상할 수 있는 '신상'일 뿐이다. 자극적인 스크린 속이 아닌 자연(이제는 명칭도 기계적이면서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오프라인'으로 바뀌었다)을 온전히 느끼는 감각마저 무뎌져 간다. 끊임없이 시선은 화면을 훑고, 손끝은 스크롤링을 반복한다. 아, 세상은 불안 아니면 그것을 잊기 위한 자극, 아니면 무료함으로 가득하다.
과연 정말 그럴까. 포기할 수 없는 질문과 답을 찾기 위한 생각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에세이를 올린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용'과 '돌봄'으로 구분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되찾는 방법으로서 '매혹'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내용이다.
원문: Tolkien's Guide to Re-Enchantment
(아래 원문 발췌)
어떻게 하면 세상에 다시 매혹될(enchanted) 수 있을까. ‘매혹’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정짓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에게 매혹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우리 스스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그 속에 참여하는 우리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근처 숲에 신비로운 힘이나 생물들이 서식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 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는 우리의 여정 자체가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알 수 없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J.R.R. 톨킨에게 매혹은 더 구체적인 것이었다. 즉, 소유욕이 없는 사랑이나 경이로움에 가까운 감정이다. 나는 이런 관점을 기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놀랍도록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톨킨은 그 방법을 이렇게 보여준다.
기쁨 대 통제
톨킨의 글에서 가장 좋아하는 점 하나는 그가 줄거리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개별 나무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나무들에게 고유한 이름과 개성, 족보를 부여하는 식으로 존엄성을 더한다. 왜일까?
톨킨이 산업 사회에 의한 자연 훼손을 혐오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우리의 세상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나무들을 대변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내 모든 작품에서 나는 나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모든 적에 맞서 싸운다.”
더 근본적으로, 톨킨은 사물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연이 의도한 대로 살아있는 나무는 우리가 그것을 이용해 만들거나 깎아낼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답다. 근대성(다시 말해, ‘마법이 사라진 상태’)은 자연을 이성적 탐구를 통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채취하고 경작할 수 있는 자원의 집합으로 본다.
현대인은 자연(인간 자신의 본성nature 포함)을 지배하고, 자신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반면 마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물 고유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며, 소유욕 없는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현대인은 자연(인간 자신의 본성nature 포함)을 지배하고, 자신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려 한다. 반면 마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물 고유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며, 소유욕 없는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반지의 제왕>은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절대 반지의 군주 사우론)과 오직 세상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자들(반지를 가벼이 여기는 호빗이나 톰 봄바딜) 사이의 긴장 관계를 탐구한다. 지배의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 마법에 다시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지배는 마법의 정반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물들이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이유(석양, 정교한 외관, 굽은 나무)는 그 안에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언가(혹은 누군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왜 우리에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내재된 가치(함부로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무엇)를 보게 해준다.
톨킨은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조화를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그런 경이로움의 상태를 되찾는 방법에 대해 그는 어떤 단서를 제시하는가?
매혹 대 마법
다시 매혹되는 법의 첫 번째 단서는 톨킨이 매혹을 마법과 구별한다는 점이다. 사우론의 ‘절대 반지’는 저속한 마법의 산물이다. 마법은 현실 세계에 변화를 일으켜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마법magic’과 ‘기계machine’라는 단어가 “할 수 있다, 힘이 있다”는 뜻의 고대 어근 ‘magh-’를 공유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우론의 마법 반지는 완전한 통제를 위한 기계다.
반면, 매혹Enchantment은 “욕망과 목적 면에서 예술적”이라고 말한다. 매혹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꾸기보다는 새롭게 창조하고자 한다. 톨킨의 엘프들이 지닌 고도의 예술은 매혹의 은유이다. 가령, 프로도와 일행에게 위장용 옷으로 선물된 로스로리엔의 엘프 망토는 자연과 조화로운 일치 속에서 만들어졌다. 피핀이 이것들이 “마법의 망토”인지 묻자, 당황한 엘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반면, 매혹Enchantment은 “욕망과 목적 면에서 예술적”이라고 말한다. 매혹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바꾸기보다는 새롭게 창조하고자 한다. 톨킨의 엘프들이 지닌 고도의 예술은 매혹의 은유이다. 가령, 프로도와 일행에게 위장용 옷으로 선물된 로스로리엔의 엘프 망토는 자연과 조화로운 일치 속에서 만들어졌다. 피핀이 이것들이 “마법의 망토”인지 묻자, 당황한 엘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잎과 가지, 물과 돌: 이 망토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루리엔의 황혼 아래 있는 이 모든 것들의 색채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네.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에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대한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지.”
엘프의 공예는 대지의 힘에 맞서지 않고 그 힘과 함께한다. 엘프들은 대지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에서 비롯된 창조의 열망에 뿌리를 둔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톨킨이 추구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매혹을 구현한다. 그들은 본래의 창조와 우리의 참여를 증진시키며, 결코 그 고유의 본성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매혹”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우리 주변 세상과의 더 가깝고 의미 있는 관계이며, 이것이 바로 엘프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매혹을 회복하는 길은 어떤 모습일까?
경이로움이나 사물에 대한 “소유욕 없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나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그 생물학적 형태와 성장 과정을 이미 알고 있다면- 어떻게 다시 그것을 경이로움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까? 현대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톨킨은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답한다.
하위-창조와 이야기
매혹은 엘프의 창조와 유사한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톨킨이 “하위-창조(sub-creation)”라고 부르는 것이다. 엘프들은 본성상 “하위-창조적”이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위-창조란 모든 피조물이 1차 세계 안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는 2차 세계에서 결실을 맺는데, 이 세계 역시 1차 창조를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판타지 소설을 쓰는 일은 하위-창조의 한 가지 분명한 방식이다. 창작자와 독자 모두가 들어갈 수 있는 풍요롭고(그리고 놀랍도록 낯선) 2차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톨킨은 에세이 <동화 이야기On Fairy-Stories>에서 판타지 이야기가 어떻게 엘프의 기술(매혹과 동의어)을 지향하는지 설명한다.
나는 아무리 문장이 우아하더라도, 평범한 철학적 저작을 통해 누군가를 진정으로 설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주장을 펼친다고 해서 진리나 도덕이 중요하다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만 설득할 수 있다.
이야기, 특히 판타지는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을 증명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철학이 세상 속에서 펼쳐질 때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세계가 정교하게 구축된 판타지라면, 그 안에 담긴 도덕적 또는 원형적 진실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현실 세계의 세부 사항들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시력의 회복
하지만 왜 판타지를 ‘재창조’(혹은 단순히 읽는 행위)하는 것이 우리가 쫓고 있는 경이로움으로 우리를 채워주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 세상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 세상을 본래의 찬란함 모습 그대로 새롭게 보려면, 먼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던 익숙함의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판타지 이야기는 새로운 시각으로 독자를 놀라게 함으로써 바로 그 일을 해낸다.
톨킨은 판타지 세계의 푸른 풀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식은 익숙함으로 인해 한껏 무뎌져 있다. 우리는 푸른 풀처럼 평범한 것들에도 내재된 경이로움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너무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2차적인 판타지 세계는 그런 익숙한 인식을 지워준다. 풀은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일 수도 있다. 그런 다음 1차적인 세계로 돌아왔을 때, ‘진짜’ 풀은 다시 새롭게,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 당신은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시야를 '맑게' 해준다:
우리는 초록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며, 파랑과 노랑, 빨강에 새삼 놀라야 한다(하지만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켄타우로스와 용을 만나고, 그 후 어쩌면 고대의 목동들처럼 양과 개, 말 그리고 늑대를 갑자기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화는 우리가 이러한 회복을 이루도록 돕는다. 그런 의미에서 동화에 대한 취향만이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만들거나, 어린아이로 남겨둘 수 있다.— J.R.R. 톨킨, 동화에 관하여
매혹은 사실 무언가를 허구의 상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더 잘 보는 것에 관한 것이다. 톨킨이 말했듯이, (익숙함의 때가 묻은) 창문을 닦았기 때문이다:
회복(귀환과 건강의 회복이라는 중의적 의미)은 되찾는 것, 즉 맑은 시야를 되찾는 것이다.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철학자들과 얽히지는 않겠지만, 감히 ‘우리가 보도록(혹은 보아야 했던 대로) 사물을 보는 것’—즉 우리 자신과 분리된 존재로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어쨌든 우리는 창문을 닦아야 한다. 그래야만 선명하게 보이는 사물들이 진부함이나 익숙함이라는 칙칙한 흐릿함—소유욕으로부터—해방될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정신적으로 점유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마음속에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유용한 알려진 양으로 축소해 버린다.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소유’하고 분류해 버리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제대로 보지 않게 된다. 따라서 환상은 현실 세계에서 일상의 경이로움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동화를 읽고 쓰는 것만이 회복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톨킨은 말한다. “겸손함만으로도 충분하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줄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늘려라. 이 지혜는 시대를 초월한 수많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내면을 너무 자주 들여다보는 것은 위험한 병이라고 말했다. “여러분, 맹세컨대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한 것은 병입니다. 진짜, 철저한 병이죠.”
워싱턴 포스트는 최근 자연 속의 한 가지 사물을 14일 동안 꾸준히 관찰하면 평균 이상의 삶의 만족도와 고양감을 얻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피실험자들은 “초월적인 유대감”을 느꼈다고 답했다고 한다. 가령, 장엄한 참나무를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톨킨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나무의 기이함에 감탄하라. 그 나무 줄기에서 무엇을 조각해 낸다 해도, 그 나무 자체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것임을 받아들여라.
그런 다음, 방금 마주한 외적인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무언가, 그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에너지를 모아보라. 외부성을 활용해 내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창조해 보라. 관찰, 스케치, 짧은 시 등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라.
톨킨은 창의적인 상상력을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치 갇힌 새를 풀어주듯 자유롭게 풀어놓으라고 말한다. 내재된 창조적 욕구를 발휘해 자연의 영원함과 조화를 이루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바로 매혹(되찾기)이고 진정한 마법이다.
톨킨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나무의 기이함에 감탄하라. 그 나무 줄기에서 무엇을 조각해 낸다 해도, 그 나무 자체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것임을 받아들여라.
그런 다음, 방금 마주한 외적인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무언가, 그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창조할 에너지를 모아보라. 외부성을 활용해 내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창조해 보라. 관찰, 스케치, 짧은 시 등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라.
톨킨은 창의적인 상상력을 내 것이 아님을 깨닫고, 마치 갇힌 새를 풀어주듯 자유롭게 풀어놓으라고 말한다. 내재된 창조적 욕구를 발휘해 자연의 영원함과 조화를 이루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바로 매혹(되찾기)이고 진정한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