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사항

서해 프로필 서해
2026-03-29 18:16
 나는 당신이 모호했으면 좋겠다. '웅-' 커피머신은 증기 소리인지 모터 소리인지 하는 그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의 일하는 XX카페에서 말이다. 언젠가 점장님께서 중고차 한 대 값이라며 아껴 쓰라던 커피머신. 나는 그 기계 뒤에 숨어 생각했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확히는 이상형을 생각했다. 희망 사항이 있다면, 나는 당신이 모호했으면 좋겠다고. 나는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메리카노 5,300원 받아가지 않은 영수증의 기호들 위에 당신의 얼굴을 그렸다. 나는 따옴표 두 개(눈) 사이에 h(코)를 그렸고* 약간의 미소를 띤 엷은 입술을 그렸다. 광대의 윤곽을 간단히 그렸고 작은 획들을 아우르는 둥근 선을 끝으로 얼굴을 완성했다. 몸은 그리려다 말았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이 작은 세상을 망쳐놓았다. 마침,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옆으로 미끄러졌고 나는 영수증의 당신을 응시한 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XX 카페입니다.”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두 명이었다. 둘은 익숙한 듯 계산대 앞에 섰다. 어색한 기풍의 빳빳한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남자와 향수 냄새 진한 어린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는 5,300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남자는 5,800원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여자가 쭈뼛거리더니 6,000원 바스크 치즈 케이크를 주문했고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는 내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를 받아 나는 17,100원을 결제 했다. 글쎄 언젠가부터 영수증 받지 않는다는 이들이 늘었다. 법인카드 이용하는 근방의 Y 무역회사 직원들을 제외하고서는 영수증 필요하지 않느냐는 물음조차 필요 없을 정도니까.... 나는 받지 않을 영수증을 의식했고 곧 결제를 마친 카드만 건넸다. 나는 무엇보다 둘의 관계가 궁금했다. 그들은 20대인지, 30대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조금 더 보태자면 10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 뉴스에서 본 성매매의 일종일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남자의 어리숙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모호함에 집중하자고 단념했다. 그들은 나의 욕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남과 여, 그들의 모호함은 내게 강한 자극을 줬다. 빳빳한 코트와 진한 향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받아 가지 않은 영수증을 당겨 뜯었다. 
짜여진 각본을 며칠이고 반복해서 읽어 숙지한, 자신의 역할을 능숙하게 소화하는, 너무도 능숙해서 무명 생활을 끝낼 수 있을까 싶은 그런, 무채색의 까메오처럼. 나는 능숙하게 에스프레소 뽑았다. 나는 모호하지 않았으므로 연습했던 모호한 표정으로 음료를 제조했다(무표정을 연습했는데, 무섭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나는 얼음 가득한 잔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스팀 레버를 내려 우유를 스팀으로 불렸고 "더도 말고 덜도말고 60도가 가장 적당하다"는 사장님의 조언을 의식하며, 레버를 올렸다. 나는 에스프레소 깔린 잔에 하트를 만들어(하트가 꽤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음료를 제공했다.
더욱이 나는 카페 일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로의 카페 알바. 그 까닭은 모호함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까메오를 연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나는 다시 글과 숫자 위에 얼굴*을 그렸다. 이번에는 다른 누구를 그렸다. 모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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