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에 성찰이 왜 필요한가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3-30 10:11 (수정됨)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intrepection이 중요하다고들 흔히 말한다. 하지만 지나친 내성, 어떤 성찰은 자기 안에 갇히게 해 더 불행하게도 만든다. 그럴 바엔 차라리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부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어떤 게 좋을까. 데이비드 브룩스가 생각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글을 썼다. 아래 원문을 발췌 번역해 소개한다.
원문: Marc Andreessen’s Mistake

몇 주 전 억만장자 투자자 마크 안드레센은 자기 삶에서 ‘내성/성찰introspection’을 제로로 만들거나 최소화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갇혀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그는 내성이라는 것은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20세기에 만들어낸 어리석은 발명품이라고 주장했다.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도 내성적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후 트위터에서는 한 술 더 떴다. “과거의 위대한 남녀들이 앉아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 한탄하지 않았다는 것은 100% 사실이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인터넷은 폭발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현대의 거대한 문화적 대립 구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한쪽에는 감정, 자기 의심, 자기 성찰 같은 ‘여자들만의’ 일에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결단력 있는 남성적인 행동가로 자처하는 비즈니스계의 이른바 롤모델들이 있다.
   
반대편엔 안드레센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전형적인 괴물로 보는 인본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안드레센을 감정적으로 빈곤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하며, 오만하고, 공리주의적이며, 경험적 데이터 이외 모든 지식엔 눈이 멀고, 탐욕스럽게 물질주의적인 존재로 본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은 이 대립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 토마스 그라드그라인드는 빅토리아 시대의 안드레센이자 공리주의적 물질주의자다. 그는 학생들과 교사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교육 이론을 윽박지르듯 내뱉는다. “내가 원하는 건 사실이다. 이 소년 소녀들에게 사실 외엔 아무것도 가르치지 마라. 인생에서 필요한 건 오직 사실뿐이다.”
   
인본주의자 디킨스는 그라드그라인드와 그의 자식들을 지옥 같은 시련에 빠뜨려, 그의 무정하고 영혼 없는 철학의 결함을 드러내며 결국 그가 무너질 때까지 몰아붙인다.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실제 삶에서 재현되었다. 공리주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 제임스는 아들을 완벽하게 이성적인 사고 기계로 키우려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밀은 정서적 붕괴를 겪으며 기쁨과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밀은 (훗날 결혼하는 해리엇 테일러의 인도로) 윌리엄 워즈워스의 낭만주의 시를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다. 이러한 구원은 종종 인본주의 진영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승리로 여겨진다.
   
인본주의자들에게 문제는 안드레센의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다. 내성은 적어도 두 가지 정신적 행위로 구성된다. 첫째, 매 순간 마음속을 휩쓸고 지나가는 믿음, 감정, 욕망의 끊임없는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다. 둘째, 행동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궁극적으로 지각과 행동을 이끄는 무의식적 과정을 파악하려는 시도다.
   
이 두 행위는 모두 믿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사람들에게 왜 특정 선택을 했는지, 혹은 왜 특정한 태도를 갖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대개 허구를 지어내곤 한다. 자신의 실제 정신적 과정을 파헤치기보다는,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럴듯한 이야기 중 자신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을 무작정 붙잡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인지과학 연구는 우리가 종종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 자신의 성격, 결정, 동기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대단히 신뢰할 수 없는 존재다. 윌 스토어가 저서 <스토리텔링의 과학>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우울한 이유를 이론화할 때도, 도덕적 신념을 정당화할 때도, 어떤 음악이 우리를 감동시키는지를 설명할 때도 우리는 허구를 지어낸다.”
   
이 때문에 많은 치료사들은 이젠 환자에게 ‘왜’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답이 허구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잘못된 자기 성찰은 오히려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 대학 시절 미숙했던 젊은이였던 나는, 내가 그토록 얕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곤 했다. 내 주변에서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형편없는 시를 쓰는 그 모든 ‘깊은’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고 비참해 보였다. 내가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었다. 내성적 성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땐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약 1만 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내성적 성찰은 전반적인 웰빙의 저하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총기 난사 사건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예전엔 상담사들이 즉시 달려와 사람들의 충격과 고통 극복을 도왔다. 하지만 연구 결과 이는 뚜렷한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생들에게 재차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우울감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음이 밝혀졌다. 어떤 이들에겐 즉각적인 성찰이 고통을 고착시켜 그 자리에 가둬버릴 수도 있다.
   
연구자 앤서니 그랜트는 내성과 통찰(insight)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통찰 없는 내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자기 내성 점수가 높은 사람들은 더 많은 스트레스와 우울감, 불안감을 느꼈으며, 직업과 인간관계에 대한 만족도는 낮았고,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덜 받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 부정적인 결과는 내성이 잦을수록 더 심해지는 듯했다.”
   
톨스토이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이지만, 그는 잘못된 내성의 대표적 사례다. 그는 평생 대부분 일기를 썼으며, 상당 부분을 자신의 도덕적 실패를 되짚는 데 바쳤다. 1851년 일기의 발췌문이다:
   
“다소 늦게 일어나서 책을 읽었지만, 글을 쓸 시간은 없었다. 푸아레가 왔고, 나는 펜싱을 했으며, 그를 돌려보내지 않았다(게으름과 비겁함). 이바노프가 왔고, 나는 그와 너무 오래 이야기했다(비겁함). 콜로신(세르게이)이 보드카를 마시러 왔는데, 나는 그를 바깥으로 배웅하지 않았다(비겁함).”
   
이런 성찰에서 문제는 그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도덕적 자기 집착을 위한 소품으로 취급했다. 그는 웅장한 작품과 영감을 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다. 평생 성자가 되려 노력했지만, 그 모든 자기 성찰은 별다른 자기 계발을 낳지 못했다. 그는 결혼 전날 아내에게 나르시시스트 같은 멍청이였고, 수십 년 후 그녀를 버리고 기차역에서 죽을 때도 여전히 나르시시스트 같은 멍청이였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든, 안드레센의 세계관에는 여전히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그는 엄청난 수준의 무지한 사람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자기 성찰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가령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몽테뉴,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등등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들 각자는 인간 본성의 심연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내놓았다. 그들의 삶은 내성을 훌륭히 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앤드레센의 두 번째 문제는 그가 과학 문맹이라는 점이다. 지난 30년간 인지 혁명은 ‘감정’이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시적 변덕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감정은 모든 합리적 사고에 필수적이다. 우리의 감정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를 할 수 없다면 의사결정의 지평은 절망적으로 평평해질 것이다.
   
레너드 믈로디노우는 저서 <Emotional>에서 신경과학자 랄프 아돌프스의 말을 인용한다. “감정은 뇌를 특정 작동 모드로 전환시켜 목표를 조정하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며, 정신적 계산을 할 때 다양한 요소에 부여하는 가중치를 수정하는 마음의 기능적 상태다.”
   
앤드레센의 편견과는달리,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식하고, 명명하는 능력은 충만한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그것의 힘은 약해진다. 좋은 삶의 핵심 하나는 감정을 주인이 아닌 조언자로 삼는 능력이다.
   
자기 내성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신경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이 말하는 ‘감정 미세화 능력’이 낮다. 이들은 ‘좋다’, ‘싫다’ 같은 기본적인 감정만 구별할 수 있다. 반면 효과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들은 감정 미세화 능력이 높다. 이들은 불안, 고뇌, 좌절, 짜증, 분노, 압박감, 스트레스와 같이 서로 인접한 감정들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내성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감정 조절에 뛰어나다. 대체로 덜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폭음할 가능성이 적고 정신 건강이 더 양호하다.
   
나쁜 내성적 성찰과 좋은 내성적 성찰의 차이는 뭘까?
한 가지는 고고학과 저널리즘의 차이점과 유사하다. 나쁜 내성적 성향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더 깊이 파고들려는 시도, 즉 내면에 묻혀 있는 답을 찾기 위해 한 층 또 한 층을 파헤치는 것과 같다. 반면 좋은 내성적 성향은 자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줄 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지켜보는 기자처럼, 자신의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을 외부에서 관찰함으로써 이뤄진다.
   
미시간 대학교의 에단 크로스는 2인칭이나 3인칭으로 자신과 대화해 보라고 제안한다. 가령, “10년 후 시점에서 이 경험을 바라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라고 자문함으로써 자신과 시간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 만약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면, 바로 그에 대해 글을 쓰기보다 자신에게 약간의 거리를 둬 보라.
   
내성적 성찰에 능숙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신 ‘무엇’, ‘어디’, '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열등감을 느끼게 한 게 언제였는가?
   
내성적 성찰을 잘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자기 몰입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행동 패턴을 잘 알아차리는 데 능숙하다. 그들은 집요하게 되새기거나, 자신의 생각이 어둡고 우울한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맴돌게 두지 않는다. 그들은 들어가서, 처리하고, 빠져나온다.
   
심리학자 제임스 페네베이커는 효과적인 내성 방법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연구들을 했다. 수십 년 전 그는 중요한 경험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단 4일 저녁 동안 하루 15분씩만 써도 되는—이 건강 문제를 덜 겪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다. 다른 연구자들은 그의 연구를 확장해, 그러한 사람들이 더 나은 면역 기능, 더 나은 정신 건강, 더 나은 학업 및 직업적 성공을 경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글쓰기라는 행위가 사람들에게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자신의 감정을 단어로 구체화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새벽 3시에 베개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끝없이 되새기는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란 어렵다. 하지만 무언가를 글로 적을 때는 단순히 내면의 상태를 파악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할 수 있도록 서사를 능동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소설가들이 오래전부터 이해해 왔듯이,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그 이야기 속에 살아가게 된다. 자기 성찰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신을 미화하거나 지나치게 비하하는 왜곡된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들려준다. 자기 미화의 경우엔 항상 흠잡을 데 없는 영웅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기 비하의 경우엔, 마치 위압적인 부모나 자신의 결점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영원한 피해자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훌륭한 자기 성찰의 상당 부분은 사실 이야기 편집에 해당한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과 가까울수록 성장하고 보람찬 삶을 살기 더 쉽다. 성찰을 잘하는 사람들은 결점과 좌절을 인정하면서도 더 높은 가능성을 가리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덴마크 작가 이사크 디네센은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으면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성찰은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성찰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내성을 하는 동안 자아는 분열된다. 행동하는 자아가 있고, 그 행동하는 자아를 관찰하는 자아가 있다. 하지만 삶은 당신이 통합되고 온전한 상태일 때,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너무 열중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 가장 잘 흘러간다.
   
최고의 삶은, 타인에게 관심을 돌릴 수 있을 만큼의 자기 이해를 얻기 위해 충분한 내성을 거친 후에 살아진다. 가장 최악의 삶은 내성을 전혀 하지 않아 자기 이해도 얻지 못했으면서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사는 삶이다. 백악관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유형이다. 아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른다는 기본적인 자각조차 없이도 엄청난 자신감으로 말할 수 있는 어떤 억만장자 투자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목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