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고통의 쓸모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2-20 22:01
이제는 AI가 다(?) 해주는데 굳이 글을 직접 다 읽고 또 힘들게 써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아래 글을 읽고 생각해 보시길.

원문: Does Writing Have to Be Hard?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문학에서 글쓰기 교육은 글쓰기를 기술이자 예술로 보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었다. 글쓰기란 가르치고 다듬을 수 있는 실용적 기술이자,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통찰을 얻는 창조적 실천이었다.
   
그 공식은 대략 이랬다: 먼저 글을 읽고, 그 다층적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 토론한 뒤, 글을 썼다. 이 순환의 마지막 단계인 글쓰기에는 고통, 어쩌면 고문이라 할 정도의 고역이 따르기도 했지만 좋은 결과도 있었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 복잡한 사상과 교감하며 자기만의 생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오늘날 챗봇의 등장은 불안한 질문을 던진다: 글쓰기가 굳이 힘들 필요가 있을까? 그 고귀한 시련이,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데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해진다면?
   
애틀랜틱의 지난 기사 아카이브를 검색해 보니 글쓰기 교육과 문명 자체는 대략 1890년경부터 이미 위기에 처해 왔다. 1893년 제임스 제이 그린노는 젊은이들의 정신이 지나친 속어 사용으로 인해 '좁은' 생각밖에 형성하지 못할 정도로 빈곤해졌다고 주장했다.
   
1959년 11월 이 잡지가 '읽기와 쓰기 교육'에 관한 특별 섹션을 실었을 때쯤에는, 표준화 시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글쓰기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바로 그 시기에 젊은이들의 정신은 현대 미디어와 '문맹적 표현'의 유행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그 당시 과장된 표현들을 비웃기 쉽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진단과 처방 뒤에는 교수로서 나의 노력을 이끌었던 기본적 생각이 깔려 있다: 글쓰기 학습은 마음 형성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헨리 챈시가 1959년 잡지에서 말했듯, '문자 의사소통의 기술'은 '명확한 사고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그 사람이 한갓 선생님일지라도)에게 이해시키려 애쓰는 힘든 과정 속에서 본질적인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튀어 나온 불꽃은 더 나은 생각, 더 복잡하면서도, 어쩌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에너지로 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생각을 하고, 단어를 찾고, 그것을 종이에 적는 과정이 상당한 불편함을 수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1912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랜돌프 본은 '글쓰기의 절망적인 노동'을 묘사했다. 본은 "차가워지거나 완전히 소진된 생각을 다시 데우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해야 한다"고 탄식했다.
   
지금 학생들이 차갑고 소진된 생각을 한꺼번에 데우려고 챗봇을 찾은 것은 아니었지만, AI 도구의 등장은 그들의 작문을 읽는 우리에게 혼란스러운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제출된 글의 일부가 약간 이상할 뿐이었다. 어떤 글들은 기계가 만든 텍스트와 인간이 쓴 텍스트가 프랑켄슈타인 괴물처럼 뒤섞인 모습이었는데, 일부는 유창하지만 공허했고, 일부는 익숙한 방식으로 억지스럽고 산만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델이 업데이트되고 AI가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자 학생들의 글에서 전반적인 매끄러움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모서리와 거친 부분이 갈려 나가면서 주장과 아이디어는 더 획일화되었다.
   
내가 맡은 글쓰기와 역사 입문 수업 시간에 미연에 방지하려 했던 학생들의 오류는 점점 덜 보였다. 역사학자의 연구서를 '소설'이라 부르는 일은 거의 사라졌지만, 4페이지 두 번째 문단에 묻힌 복잡한 문장 속에 담긴 아름답고 기이한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일도 사라졌다.
   
작년 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블루북을 꺼내 학생들에게 수업 중 에세이 시험을 보게 했다. 그들의 삐뚤빼뚤한 필체를 읽어야 하는 것은 작은 대가였다. 그 대가로 그들의 생각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어수선하지만 생생한 생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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