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산행과 독서를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Journey
2024-10-02 09:48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레킹을 갔다온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든 산을 왜 오르는가? 이런 질문을 농반 진반으로 곧잘 하곤 합니다.
굳이 힘든 산에 오르는 것은 정상 등정의 희열이나 아름다운 풍경 감상의 흥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니 그 여정이 인생의 축소판 같아서라는 이유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에 오를 때는 무엇보다 꾸준해야 하고, 오래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니 짐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필요하고 더 중요한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깊은 산은 그만큼 날씨도 변화무쌍해서 일희일비해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합니다.
따라서 길을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한번 길에 들어서면 맘대로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선택한 이상 겪게 될 어떤 일도 의연히 대처하고 감내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두 발로 모든 경로를 거쳐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멋진 외모나 외형이 아니라 튼튼한 다리와 심장, 판단력과 균형감입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있으면 좋습니다. 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합니다.
과신과 자만은 금물입니다. 언제든지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만큼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트레킹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정상 정복의 순간(=끝)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동안의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기나긴 여정(과정)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산에 오르며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고 실습할 수 있습니다.
굳이 높은 산에 오르는 것도 그저 오른 산의 높이를 자랑하기 위해서이기보다, 높은 만큼 여정이 길고 다채롭고, 그런 만큼 갖가지 체험의 내용과 깊이도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에서 가능한 한 높은 산을 오르는 것, 적어도 지향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작은 언덕에 불과한 산을 반복해서 오르거나 고만고만한 산을 여러 개 오르는 것보다는, 오랫동안 꾸준히 노력을 기울일 만한 큰 산에 오를 때 더 높고 다채로운 것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높은 산에 도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그에 걸맞은 준비와 단련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오르는 동네 매봉산 체력단련실에는 매달 새로운 사자성어가 게시판에 나붙습니다.
어느 분이 매달 좋은 글을 골라 붓글씨로 써 오시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浮雲朝露(부운조로)였습니다. 뜬 구름, 아침 이슬이란 뜻이지요.
둘 다 오래 머물지 않고 흩어지거나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흔히 덧없는 인생의 은유로 이해하곤 하지요.
우리가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어떤 때는 너무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는 것들, 아니면 너무나 당연시하고 영원불변할 거라고 생각해서 소중한 줄 모르는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결국 지금 우리 곁에 있지만 흩어지거나 사라지고 마는 것은 무엇이고, 오래오래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함께 읽은 <인간의 조건>에서도 아렌트는 인간은 활동에 있어서도 단순 반복 순환에 머물지 않고 지속과 불멸을 추구한다고 했지요.
삶에서 높은 산이란 우리의 주의를 뺏는 눈앞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나 추구할 만한 진선미의 높은 가치일 것입니다. 그 가치를 척도로 각자 '좋은 인간', '좋은 삶'을 빚어가는 것이 우리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눈앞의 것들도 삶 전체를 구성하는 의미의 연결 고리에서 제자리를 찾고, 그 삶은 의미와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지고 다같이 고양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선미란 무엇일까요? 먼 북극성 같고 아련한 무지개 같은 그것을 현실에서 찾고 구현하기 위해 궁리하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각자의 몫이자 우리 모두의 몫이겠지요.
함께 좋은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클럽 오리진의 모토를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세상을 탐구하고
타자를 이해하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가는 길
북클럽 오리진이 함께합니다.

목록

댓글

경비병 | 2개월 전

두고두고 계속 읽고 싶은 글이네요. 쭉 읽다가 마지막에 소름 돋았습니다 ㅎㅎ

오렌지 | 2개월 전

멋진 곳에 다녀오셨군요! 부럽습니다. 부운조로라는 말 처음 들어보았는데 인상깊습니다. 유한한 시간 속 진선미의 의미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