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가
땡초맛 새우깡
2024-09-18 22:41
전체공개
인간 조건의 기초적인 구성요소는 노동, 작업, 행위이다.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 인간이 있기에 모든 것이 실존 조건이 되고, 인간은 그 조건에 제약을 받는다. 노동과 작업, 행위는 시대에 따라 개념이 달라져 왔지만, 현대로 오면서 마침내 인간소외, 세계소외를 걱정해야 할만큼 실존의 요소들이 경시, 모호해지고 있으며 그 시작은 (인간을 무쓸모하게 만드려는) 과학과 기술로 부터 촉발되고 있으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사고없음 이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 정치적 존재이기에 인간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전체주의는 그야말로 인간 본질에 반한다. 또한 전체주의적 과정이란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라고(32p)라고 정의되며, 근본악에 해당한다. 근본악의 출현은 거대한 음모나 악의가 아니라 무사고(무지와 무관심)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한’ 정치적 존재이기에 인간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전체주의는 그야말로 인간 본질에 반한다. 또한 전체주의적 과정이란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라고(32p)라고 정의되며, 근본악에 해당한다. 근본악의 출현은 거대한 음모나 악의가 아니라 무사고(무지와 무관심)에서 출발한다.
기술에 대한 아렌트의 관점은, 단지 내가 믿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면죄부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녀의 관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인간을 더욱 편리하게’라는 기치 아래 인간을 무쓸모한 존재로 변모시키는 데 일조하고, 문명의 발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도 반대급부로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사고를 발휘(!)한다. 그리고 ‘정치적 언어’化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과학의 언어를 마치 진리인 양-혹은 진짜 진리로-받아들이고, 사회나 국가라는 집단에 숨거나 또는 일원이라는 점에 저항조차 하려하지 않고(=용기를 잃고), 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산다. 노동에 예속된 것은 ‘생계’를 위해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행동 양식만큼은 그녀가 가장 경계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유약한 인간은 스스로 고립과 고독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과학과 기술문명으로 인간 삶과 활동이 획일화되고, 공론 영역 다원성을 잃고, 점차 공간에 대한 소유도 상실되며, 마침내 공론 영역의 소멸하면 (공존하던) 사적영역도 소멸되면서 개인소외, 세계소외에 이른다. 이 불행한 결과의 시작이 과학과 기술이기에 ‘인간 실존’이라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결정을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에게 결코 맡길수 없다‘는게 아렌트의 설명이다.
당연히 인간이 인간을 위한 목적으로 행위하고 살아가니까 대의민주주의, 과학실증주의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기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나이브 한 생각인가. 정치인과 과학자들은 나의 삶을 정말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인가. 그들이 하는 약속은 진실일까. 아니면 그들조차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믿음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거짓인줄 알면서도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모른척하면서 회피하고 있지 않나.
당연히 인간이 인간을 위한 목적으로 행위하고 살아가니까 대의민주주의, 과학실증주의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기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나이브 한 생각인가. 정치인과 과학자들은 나의 삶을 정말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인가. 그들이 하는 약속은 진실일까. 아니면 그들조차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 채 각자의 믿음으로 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거짓인줄 알면서도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모른척하면서 회피하고 있지 않나.
왜 태어났는지를 고민하지 말고, 태어났으니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라는 부처의 말도 아렌트가 얘기하는 활동적 삶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지난번 읽었던 ’정치 때문에 비통함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통함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어떤 가치를 위하여, 어떤 방향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소통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노동에 예속되어 과거의 그리스인처럼 정치적인 것들만으로 삶을 채우며 살아갈 수도 없다. 최소한의 인간 삶을 누리고 유지하기 위해서, 소유가 사라진 공간이라도 얻기 위해서 노동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삶과 피로함에 대한 변명이 이윽고 아렌트가 경계한 ’사고 없음‘과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라는 생각에 일단은 브레이크를 두어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일까. 내가 추구할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간끼리만 있어도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우리 존재가, 인간의 최고 지성으로 태어난 과학과 기술에게 끝내 배신당할 수도 있는 거라면 인간 존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어디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까. 그러한 소외가 개별 개인 차원 뿐만아니라, 세계소외에 이를 수 있다니. 용기가 거세된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서운 단어같다. 그나마 타인과의 상호관계가 중요하다라는 말에, 수신제가지국평천하라고, 일단 우리 가족부터 다독이고 지키고 사는 것부터가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일단 안심해보는 성급한 결론을 내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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