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골목, 작은 무대

2411 시즌 - 책 <인챈트먼트>

이초록
2025-02-20 00:54
전체공개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의자에 앉으면 작은 골목길이 보인다. 길 왼쪽에는 큰 돌들을 시멘트로 고정한 투박한 담벼락이 있고, 그 위로 기울어진 나무와 제멋대로 자란 수풀이 있다. 수풀 속에서 불쑥 나온 덩굴은 담벼락을 반쯤 덮고 있는데 언젠가 온 벽을 뒤덮을 듯 푸르고 싱싱하다. 담 아래로 이어진 바닥도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다. 마감이 거칠어 곳곳이 튀어나와 그림자를 만든다. 담 맞은편 오른쪽에는 갈색 벽돌로 층층이 쌓아 올린 연립빌라가 있다. 벽돌에는 바람이 깎아 낸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벽돌 위 하얀 글자는 유독 선명하고 깨끗하다. 이 오래된 빌라는 골목길의 끝이자, 이 길이 존재하는 이유다.

낮에 본다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이 골목길을 나는 좋아한다. 해가 지고 집이 어두워지면 괜스레 서먹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 때 조용히 길을 밝히는 골목길을 바라 보면 고요하고 느린 평온이 밀려온다.

이 골목길에는 도로변 하얀 빛을 내는 LED 가로등과 달리 노란 빛을 내는 구릿빛 가로등이 있다. 노랗고 침침한 이 가로등 불빛 덕분에 가파르고 거친 골목길은 밤이 되면 이야기를 시작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노란색의 작은 빛은 마치 스포트라이트 같고, 하얀 시멘트 바닥은 양옆의 초록 담벼락, 갈색 벽과 대비되어 무대처럼 선명하게 빛난다. 한 번은 뒷짐을 지고 길을 오르는 어르신을 보았는데, 이슬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연극은 틀림없이 삶의 피로와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또 한 번은 커다란 가방을 멘 학생을 보았다. 밤늦게 가파른 길을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막 서울에 상경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학생이 어떤 이유로 늦게 집에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문득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끔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길을 걸으면, 노란 조명 아래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영화 같은지 알려주고 싶었다. 형광등 같은 하얀 불빛 아래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저절로 음악이 흐르는 풍경 같았다.

책을 읽다 문득 창밖을 보면 길을 오르는 이웃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가끔은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넨다. ‘저도 막 집에 도착했습니다. 얼른 집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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