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의례를 수행하도록 진화한다.

2503 시즌 -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독후감

산이화
2025-04-16 17:54
전체공개

  이 제목은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라는 책을 그리 힘들지 않게 속독한 후 내게 맞도록 다시 붙여본 제목이다.
'갈망'이라는 갈급함보다는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할만큼 자연스럽게 의례 속에서 살아온 내 느낌을 살려봤다고나 할까... 

  살아온 시간들을 더듬어보면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선명한 의례들이 몇 가지 있다. 

* 기억 하나

국민학교 4학년때, 병약한 아버지를 위해 앞마당에서 무당이 벌인 굿 장면이다.
식구들은 끊임없이 두 손을 모아 빌고 있고, 화려한 차림의 무당(당골래)이 격렬한 징과 북소리에 맞춰서 춤을 추며 아버지를 덮고 있던 하얗고 넓은 무명천을 스쳐가면 그것이 저절로 스르륵 반이 갈라지면서 마당으로 떨어지던 신기한 광경이다. 자르는 사람은 분명히 없었는데 저절로 정확하게 무명 천이 반이 나뉘었던 기억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가난한 살림에 비싼 댓가를 치룬만큼 아버지는 고통이 줄었고, 식구들은 상실에 대한 심리적 안정을 얻었을까? 

* 기억 둘

종교의례와 관련한 나의 최초 체험은 아주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산 속으로 오래 걸어가서 만났던 작은 절간이다. 입구부터 나를 압도한 사천왕상은 너무 기괴하고 무서웠으며 향 냄새는 그보다 더 싫어서(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절에서 풍기는 향내가 참 좋다)  그 뒤로는 다시는 안갔고 한동안 사찰은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그러다 친구 따라 간 교회는 그 이상한 냄새도 안나고 좋아하는 노래도 부르고 성경은 이야기를 좋아했던 내겐 매우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교회건물이 우리 동네서 젤 좋아서 그 안에 있으면 내가 세련된 사람인것만 같아서 한동안 드나들었다. 

* 기억 셋

중학교에 들어가서 세계사를 배우다 보니 교회 말고도 그 이전부터 있었던 종교가 우리 동네에 성당이라는 것을 알았다. 외국 신부님, 반복되는 알수 없는 의례, 거기에 사용되는 반짝이는 은도구들, 반복해서 일어서고 앉고 무릎 꿇는 성찬식에 매료되어 바로 교회를 떠나 성당을 다녔다. 특별히 세례를 받은 사람만 먹을 수 있는 밀빵(예수님의 몸)과 고해성사를 하고 싶어서 교리공부도 열심히 했다. 생각해보니 저자가 말한 '의례가 엄격할수록 더 진지하고 가치있게 보여서' 선택한 나의 결정이었던것 같다. 

* 기억 넷

가톨릭을 믿는 시댁의 영향으로 어찌저찌 성당에서 결혼식까지 했지만 큰 아이 출산 때는 남편이 같이 있으면 산모와 아이가 모두 위험하다는 점쟁이의 말을 전한 친정엄마의 권유로 남편 없이 출산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는지 순산이었다. 둘째 출산, 직장생활 등 세속적인 인간 삶을 유지하면서 자주 수행하고 반복되는 일화기억으로서의 종교생활은 점점 어려려워졌고, 많은 정보를 통해 알게 된 중세 가톨릭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성당출입은 소원해졌고 지금까지 냉담중이다. 
지금은 교의적 방식이 아닌 심상적 방식으로 신을 체험했다는 친한 지인들로부터 종교생활을 함께 하자는 압박?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거부중이다. 아마도 나의 삶이 위험 부담이 높고 통제불능 상황이나 불확실한 삶이 계속되어 불안과 스트레스가 많았다면 달라졌을까? 냉담한지 한참이 흐른 뒤었음에도 수술실에 들어간 아이가 나올 때까지의 긴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연신 성호를 긋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던 나를 되돌아보면 인간은 의례를 갈망하고 나 또한 그렇다는 것은 자명한 듯하다. 

  사회문화적 의례로 관점을 넓혀보면 사실 나의 삶은 거의 모든 것이 관혼상제 등 무수히 많은 각종 의례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어떤 의례는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 뜻도 모른채 치뤘을 것이고, 또 몇 몇 의례는 지금까지도 맘 속에 오래 기억되는 것도 있으며 내가 죽기 전에, 아니 죽은 후에도 이어지고 새로 생겨나는 많은 의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도, 세계 여러 곳에서 머나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모든 의례는 인류의 기본적인 사회적 행위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다양한 현지 맥락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관찰 사례와 과학적인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 모든 의례행위가 논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나름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또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예상대로 인간은 다양한 의례를 활용해서 집단의식, 정서일치, 협력적인 집단구성, 심리적 안정 등의 이득을 얻었고 지금도 개인적으로도 위안, 지지, 회복력과 치유능력으로서의 보완기능을 여전히 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특별히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일화는 저자가 언급한 뉴질랜드 럭비 국가팀이 시합 전에 지금도 행한다는 '하카'라는 의식용 전투춤이었다. 4개월 전 쯤, 뉴스에서 뉴질랜드 의회에서 마오리당 한 여성 의원이 마오리족 권리를 재해석하는 법안의 표결을 중단하고자 의회에서 눈을 부릅뜨고 종이를 찢으며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을 보았는데, 바로 그 행위가 '하카'였던 것이다. 심지어 같은 당 의원들도 금새 합세하고 관람자도 모두 함께 똑같은 동작으로 발을 구르고 눈을 부릅뜨고 의례를 진행하는것을 보고 아직도 원주민 의식을? 하며 가볍게 넘겼는데, 그들에게는 위험과 통제불능 상태를 극복하는 강력한 접착제로서 하카라는 의례가 절박하게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법안은 지금까지 중단되어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그 장면을 다시 찾아보니 그들에게 닥친 불확실성과 절박함이 그들 조상으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이어져 온 '하카'라는 의례를 통해서 표현되고 연결되어 사회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역시 인간은 의례를 수행하도록 진화하고 있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현장을 지금도 목격하고 있다는것을 확인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 각 장의 차례 제목을 연결하여 내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의례에는 이유가 없지만 인간은 의례적인 종이어서 의례를 활용해서 무질서 속의 질서를 만들고 인간 사회를 접착시키고 군중을 열광시키며 비용과 희생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 건강과 행복을 위해 지금도 의례의 힘을 이용하고 있다. 나도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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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개월 전

무당의 굿, 절의 사천왕, 개신교회의 예배당, 가톨릭 성당의 성찬식, 엄마가 전해준 점괴, 마오리족의 하카... 의례의 연속이군요. 생생한 체험담이 눈에 선하네요.

산이화 | 1개월 전

제가 너무 오래 살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