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례화가 가능할까?
2503 시즌 - 책 <인간은 의례를 갈망한다> 독후감
2025-04-16 23:56
전체공개
솔직히 말하면, 난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릴 걱정 안 해도 되는 그런 대학교 졸업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선후배 눈치도, 상사 눈치도 보지 않고 정말 편한 동료들과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회식이면 좋겠다.
정말 가끔은 가능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명절 때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나 용돈 걱정, 친척들의 사적인 질문들 없이 그냥 가족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솔직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혼식? 당연히 모두에게 축하받고 싶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지인이 많고, 나는 거의 없다.
괜히 초대할 사람도 별로 없는, 초라한 결혼식이 될까봐 걱정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의례의 중요성’은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됐다.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소속감을 만들어주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문제는 내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론은 공감되지만, 체감은 잘 안 된다.
한국에서 ‘의례’라는 건 이제 점점 의미를 잃은 강요처럼 느껴진다.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피곤하고, 불편하고, 보여주기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피하게 된다.
의례는 어느새 ‘누구를 위한 거였는지’조차 잊힌 형식이 되어버렸다.
어디 가면 누굴 만날지 몰라 기대됐던 우연한 만남도 이제는 그냥 회피의 대상이 됐다.
사실 의례라는 게 아주 실용적인 것도 아니고, 당장 눈앞에 효과가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자꾸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의례의 부재가 지금 한국 사회의 관계성과 공동체 감각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한 의례란, 꼭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문화적 장치다.
의례가 있기 때문에 어떤 공동체가 유지되고, 구성원들이 ‘나도 여기에 속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활동을 할 때마다 다들 ROI(투자 대비 효용)부터 따지고 든다.
그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공동체적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늘 “한국 사회가 너무 빠르게 압축성장을 해서 문제”라는 말은 많이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속도 때문에,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의례들을 제대로 학습하고 내면화할 시간조차 없었던 건 아닐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건강한 의례를 문화로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재의례화, 과연 가능할까?
지금 존재하는 의례를 시대에 맞게 바꾼다거나(예: 새로운 형태의 회식), 혹은 완전히 새로운 의례를 만드는 게 가능하긴 할까?
가능하다고 쳐도, 사람들이 좋아하기 시작하면 상업화되고, 그러다 보면 의미는 또 퇴색된다.
‘스몰웨딩’이 좋은 예다. 처음에는 진정성 있는 시도로 시작됐지만, 어느새 인스타그램 콘텐츠가 되고, 업체들이 달려들고, 또다시 눈치와 비교의 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너무 흔한 말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뀐다.
이 변화의 속도에 비해, 의례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반복적이고 형식화되어야 하고, 상징성과 소속감을 담아야 하고, 어떤 ‘비용’도 수반해야 하는데… 요즘 세대는 그걸 감당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줄임말, 틱톡 챌린지, 유행 따라하기 같은 건 의례일까?
기준을 다시 떠올려보면....
-반복되고 형식화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실용적인 목적을 넘는 상징성이 있으며,
-정체성, 소속감, 가치관을 드러내고,
-시간, 노력, 사회적 리스크 같은 비용이 따르며,
-개인과 집단에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준다.
이 기준을 적용해 보면, 요즘 세대가 쓰는 줄임말이나 챌린지 문화는 확실히 의례적 특성을 가진다.
어떤 단어를 쓴다는 건 그 세대가 공유하는 문화를 몸에 익혔다는 신호고,
그걸 못하면 ‘낡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대적 의례들이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동조 압력이 너무 강하다. 따라하지 않으면 도태된 것처럼 여겨지고, 실질적으로는 비자발적인 의례 수행이 된다.
게다가 유행을 주도하는 건 더 이상 사람도 아니고 커뮤니티도 아니다.
알고리즘이 만든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결국 자기표현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반응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유행은 너무 빨리 바뀐다.
소속감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줄임말, 챌린지, 표현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결국 피로감과 소비 압력으로 돌아온다.
그렇렇다면 요즘 시대에 맞는 의례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북클럽 활동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역성과 소규모성.
작고 지역적인 모임일수록 상업화될 위험이 낮지 않을까 싶다.
커스터마이즈된 의미는 팔리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
둘째, 모호성?
딱 떨어지는 형식보다, 조금은 어설프고 설명하기 어려운 의례가 오래갈 것 같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는 결혼식이나 회사 회식처럼 명확하게 구조화된 의례는 확장성은 크지만, 그만큼 상업화에 취약하다.
셋째, 관객을 거부하자.
의례는 함께 경험하는 ‘행위’여야지, 보여주는 ‘콘텐츠’가 되어선 안 될 것 같다.
SNS에 올리기 위한 의례는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가 되기 쉽다.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이런 것 아닐까?
의례를 회복하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만드는 일....
그건 누군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스크립트를 짜서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진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북클럽에서 해보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비판적으로 시작한 독후감을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마무리한다ㅎㅎㅎ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선후배 눈치도, 상사 눈치도 보지 않고 정말 편한 동료들과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회식이면 좋겠다.
정말 가끔은 가능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명절 때는 부모님께 드릴 선물이나 용돈 걱정, 친척들의 사적인 질문들 없이 그냥 가족들끼리 오랜만에 만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솔직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혼식? 당연히 모두에게 축하받고 싶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지인이 많고, 나는 거의 없다.
괜히 초대할 사람도 별로 없는, 초라한 결혼식이 될까봐 걱정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의례의 중요성’은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이 됐다.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소속감을 만들어주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문제는 내 현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론은 공감되지만, 체감은 잘 안 된다.
한국에서 ‘의례’라는 건 이제 점점 의미를 잃은 강요처럼 느껴진다.
공동체를 단단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피곤하고, 불편하고, 보여주기식이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피하게 된다.
의례는 어느새 ‘누구를 위한 거였는지’조차 잊힌 형식이 되어버렸다.
어디 가면 누굴 만날지 몰라 기대됐던 우연한 만남도 이제는 그냥 회피의 대상이 됐다.
사실 의례라는 게 아주 실용적인 것도 아니고, 당장 눈앞에 효과가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자꾸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의례의 부재가 지금 한국 사회의 관계성과 공동체 감각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해한 의례란, 꼭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문화적 장치다.
의례가 있기 때문에 어떤 공동체가 유지되고, 구성원들이 ‘나도 여기에 속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활동을 할 때마다 다들 ROI(투자 대비 효용)부터 따지고 든다.
그 순간부터 그건 더 이상 지속 가능한 공동체적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늘 “한국 사회가 너무 빠르게 압축성장을 해서 문제”라는 말은 많이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속도 때문에, 인간 사회에 꼭 필요한 의례들을 제대로 학습하고 내면화할 시간조차 없었던 건 아닐까?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건강한 의례를 문화로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재의례화, 과연 가능할까?
지금 존재하는 의례를 시대에 맞게 바꾼다거나(예: 새로운 형태의 회식), 혹은 완전히 새로운 의례를 만드는 게 가능하긴 할까?
가능하다고 쳐도, 사람들이 좋아하기 시작하면 상업화되고, 그러다 보면 의미는 또 퇴색된다.
‘스몰웨딩’이 좋은 예다. 처음에는 진정성 있는 시도로 시작됐지만, 어느새 인스타그램 콘텐츠가 되고, 업체들이 달려들고, 또다시 눈치와 비교의 장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너무 흔한 말일 수도 있지만,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뀐다.
이 변화의 속도에 비해, 의례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반복적이고 형식화되어야 하고, 상징성과 소속감을 담아야 하고, 어떤 ‘비용’도 수반해야 하는데… 요즘 세대는 그걸 감당할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줄임말, 틱톡 챌린지, 유행 따라하기 같은 건 의례일까?
기준을 다시 떠올려보면....
-반복되고 형식화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실용적인 목적을 넘는 상징성이 있으며,
-정체성, 소속감, 가치관을 드러내고,
-시간, 노력, 사회적 리스크 같은 비용이 따르며,
-개인과 집단에 심리적, 사회적 영향을 준다.
이 기준을 적용해 보면, 요즘 세대가 쓰는 줄임말이나 챌린지 문화는 확실히 의례적 특성을 가진다.
어떤 단어를 쓴다는 건 그 세대가 공유하는 문화를 몸에 익혔다는 신호고,
그걸 못하면 ‘낡았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대적 의례들이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동조 압력이 너무 강하다. 따라하지 않으면 도태된 것처럼 여겨지고, 실질적으로는 비자발적인 의례 수행이 된다.
게다가 유행을 주도하는 건 더 이상 사람도 아니고 커뮤니티도 아니다.
알고리즘이 만든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결국 자기표현이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반응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유행은 너무 빨리 바뀐다.
소속감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줄임말, 챌린지, 표현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결국 피로감과 소비 압력으로 돌아온다.
그렇렇다면 요즘 시대에 맞는 의례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북클럽 활동에서 그 힌트를 찾았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지역성과 소규모성.
작고 지역적인 모임일수록 상업화될 위험이 낮지 않을까 싶다.
커스터마이즈된 의미는 팔리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다.
둘째, 모호성?
딱 떨어지는 형식보다, 조금은 어설프고 설명하기 어려운 의례가 오래갈 것 같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진행되는 결혼식이나 회사 회식처럼 명확하게 구조화된 의례는 확장성은 크지만, 그만큼 상업화에 취약하다.
셋째, 관객을 거부하자.
의례는 함께 경험하는 ‘행위’여야지, 보여주는 ‘콘텐츠’가 되어선 안 될 것 같다.
SNS에 올리기 위한 의례는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가 되기 쉽다.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이런 것 아닐까?
의례를 회복하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만드는 일....
그건 누군가 대신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스크립트를 짜서 실행하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진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그게 바로 우리가 이 북클럽에서 해보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비판적으로 시작한 독후감을 나름 뿌듯한 마음으로 마무리한다ㅎㅎㅎ
댓글
저자에 생각에 동의하기 어려웠던 마지막 장에 대한 근거와 해답을 이든님이주셨네요. ^&^
의례의 회복, 새로운 감각 만들기, 불완전하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진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간의 경험과 솔직한 소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