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우리는 홍성으로 향했다. 북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책으로 이어진 인연 속에서 각자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조금씩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외로운 존재이기에, 이렇게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언젠가는 혼자 생을 마감하게 될지라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함께’라는 이름으로 머물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다른 행위지만,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가며 그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이고, 쓰는 일은 그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읽고 쓰며 조금씩 성장하고, 어느 순간 저자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연결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연결을 가로막는 장벽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경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찰력의 부족, 또 하나는 게으름이다.
첫 번째, 통찰력 부족은 책 속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 느껴진다. 어떤 이야기들은 표면만 읽어서는 다가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내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들’ 너머의 의미를 포착해내야 하는데, 나는 자주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첫 번째, 통찰력 부족은 책 속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 느껴진다. 어떤 이야기들은 표면만 읽어서는 다가갈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내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들’ 너머의 의미를 포착해내야 하는데, 나는 자주 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번째는 말 그대로의 게으름이다. “조금 이따 읽지”, “조금 이따 쓰지”라는 합리화 속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자꾸 미뤄버린다. 이런 습관은 분명 고쳐야 한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나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바꾸려 하지 않는 걸까?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이 책,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오히려 첫 번째 이유, 통찰력 부족에 대한 작은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조지 손더스는 이 책에서 단편소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지를 알려준다. 만약 이 책 없이 단편들을 그냥 읽었더라면, 나는 분명 “이게 끝이야?”, “갑자기 죽는다고?” 같은 감상만 남기고 넘겼을 것이다. 실제로 ‘단지 알료샤’를 처음 읽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 너무도 담백하고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였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손더스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보였다. 이 소설은 단조롭고 빈공간이 많은 구조이지만, 바로 그 빈틈 속에서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알료샤와 다를까?”
소설이 스스로 답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렇게 섬세한 안내를 해주는 책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고전소설을 읽고도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어떻게 해석할지를 디테일하게 알려주는 사람은 내 주변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었는데 내가 찾지 않았거나, 찾으려 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그리고 나처럼 읽고는 싶지만 자주 헤매는 독자들에게 아주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작가가 읽는 방식으로 책을 읽고,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고, 무엇보다도 ‘읽은 후 나에게 남는 것’을 붙잡는 훈련을 도와준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게으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책을 읽고 싶다. 손더스가 보여준 그 방식처럼, 문장을 통해 작가와 연결되고, 그 연결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읽기를 계속 시도해보려 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게으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 더 의식적으로 책을 읽고 싶다. 손더스가 보여준 그 방식처럼, 문장을 통해 작가와 연결되고, 그 연결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읽기를 계속 시도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