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글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할 말이 있다는 뜻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게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있는 것이든, 누군가 특정인에게 하고싶은 말이든, 자신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글의 '목적'이라느니 화자의 '의도'라느니 이름 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글을 읽을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이런 글을 적은 의도가 뭔데?", "내가 여기서 뭘 느껴야 하는거지?" 라는 무의식적인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만다. 이 책은 그런 독자의 무의식을 꺼내어 짚어준다.
책에서 잠시 비유하듯이, 어쩌면 우리는 읽기 좋은 글이 마치 잘 만든 영화처럼 고도로 설계된 채 작성되었으리라는 약간의 확신도 기저에 깔고 있을지 모른다. 한 때 영상이론의 기초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구태여 카메라로 찍어가며 편집을 거쳐 영상물을 만든다는 것은 치밀하게 화면을 설계하는 의도로 점철 되어 있다고 배운 바가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과연 그런건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영상물을 만드는 것 역시 뭔가를 보여주고 싶고 함께 보고싶다는 것일 테다. 보는 이에게 전달하려는 바가 있으니 공을 들여 설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라는 것은 의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일까?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마치 계획이 앞세워지고 그리고 행동은 철저하게 이를 따르는 것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일상속의 '의도'라는 것은 거의 행동과 수 초도 차이 나지 않을 만큼 동시에 일어난다. 행하는 사람은 그의 초점이 의도에 집중되어있지 않은데, 이것을 파악하고 판단하려는 순간 바깥의 관점에서 '이런 의도인가 보구나!' 라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어떤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을 과연 누가 봐 줄 것인지, 즉 관객이 누구일것인지는 사실은 미리부터 짐작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느끼게끔 하려는 '의도'로 설계를 한다면 어느정도는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작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사실상 불특정 다수이다. 도대체 어떻게, '의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보여주고 싶고 전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손더스가 적은 것처럼 '삶에서 느낀 모호한 무언가를 정리하려는'행위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이미 만들어진 것을 보고 있으니 '나'라는 존재가 중심이 되어 '대중인 '내가' 영화를 볼때 이렇게 보라고 제작자가 만들었나보다'라고 여기게 되지만 사실상 제작자의 시선에 제대로 감화되는 작품은 치밀하게 설계된 작품이 아니라 제작자가 세상의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정리해둔 작품이다. 우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적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이 알고 본 것들을 다시 떠올리며 글을 느끼게 된다. 마치 <가수들>에 등장하는 야시카의 노래와 같은 것이다. 야시카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모두가 울었으면 하는 의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진솔한 서글픔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각자가 기억하는 진솔한 서글픔을 음악에 빗대어 떠올리고 눈물짓게 된다. 심지어는 이 장면을 단지 묘사한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그들이 떠올렸을 진솔한 서글픔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다시 독자만의 진솔한 서글픔마저 떠올릴 수 있다. 손더스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그 좋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작 어떤 글을 쓰고 있을 때에는 누구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도 어쨌건 써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진지한 마음으로 쓰게 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는 글에 자기 자신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에고'를 내세워 글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히 남들 앞에 드러내보려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감각에 대해 갑작스레 꺼내어 볼 용기 같은 것이 글을 쓰게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글을 쓰다보면 어떤 때에는 특히나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의도'보다도 더 앞서서 '분명히 이런 구조로 쓰면 내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가 뚜렷해질 것이다'라고 완전히 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어떤 기법들마저 발현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정보와 서술의 축적이기도, 분산이기도, 반복이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의도한대로 쓰고자 한만큼 쓸 수 있다면 대단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교가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사람은 글이 쓰여있는 것을 보면 읽는 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이게 뭐에 대해 쓴 글일까?'라는 최소한의 호기심을 갖게되기 마련이고 훑어보기도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스쳐지나갈 수록 뭔가를 이미 읽어버린 마음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기도 하고 공감이 되기도 하고 잠시 의심스러워하며 유보하기도 하는 등의 의식들이 바쁘게 새로운 기억을 남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글이 타인에게 무엇을 남기게 될지는 미지수일 수 있으나 분명히, 내가 뭔가를 느낄 수 있는 만큼 타인도 자신만의 것을 느끼고 떠올려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무엇이든 꺼내어 볼 수 있는 용기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세상에 대고 할 말이 있는 것이든, 누군가 특정인에게 하고싶은 말이든, 자신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글의 '목적'이라느니 화자의 '의도'라느니 이름 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글을 읽을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데?", "이런 글을 적은 의도가 뭔데?", "내가 여기서 뭘 느껴야 하는거지?" 라는 무의식적인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만다. 이 책은 그런 독자의 무의식을 꺼내어 짚어준다.
책에서 잠시 비유하듯이, 어쩌면 우리는 읽기 좋은 글이 마치 잘 만든 영화처럼 고도로 설계된 채 작성되었으리라는 약간의 확신도 기저에 깔고 있을지 모른다. 한 때 영상이론의 기초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구태여 카메라로 찍어가며 편집을 거쳐 영상물을 만든다는 것은 치밀하게 화면을 설계하는 의도로 점철 되어 있다고 배운 바가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과연 그런건가?'하는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영상물을 만드는 것 역시 뭔가를 보여주고 싶고 함께 보고싶다는 것일 테다. 보는 이에게 전달하려는 바가 있으니 공을 들여 설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라는 것은 의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일까?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마치 계획이 앞세워지고 그리고 행동은 철저하게 이를 따르는 것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일상속의 '의도'라는 것은 거의 행동과 수 초도 차이 나지 않을 만큼 동시에 일어난다. 행하는 사람은 그의 초점이 의도에 집중되어있지 않은데, 이것을 파악하고 판단하려는 순간 바깥의 관점에서 '이런 의도인가 보구나!' 라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어떤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을 과연 누가 봐 줄 것인지, 즉 관객이 누구일것인지는 사실은 미리부터 짐작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느끼게끔 하려는 '의도'로 설계를 한다면 어느정도는 상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작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사실상 불특정 다수이다. 도대체 어떻게, '의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보여주고 싶고 전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영화를 만든다면 그것은 손더스가 적은 것처럼 '삶에서 느낀 모호한 무언가를 정리하려는'행위에 더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야 이미 만들어진 것을 보고 있으니 '나'라는 존재가 중심이 되어 '대중인 '내가' 영화를 볼때 이렇게 보라고 제작자가 만들었나보다'라고 여기게 되지만 사실상 제작자의 시선에 제대로 감화되는 작품은 치밀하게 설계된 작품이 아니라 제작자가 세상의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정리해둔 작품이다. 우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적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이 알고 본 것들을 다시 떠올리며 글을 느끼게 된다. 마치 <가수들>에 등장하는 야시카의 노래와 같은 것이다. 야시카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모두가 울었으면 하는 의도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진솔한 서글픔을 담아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각자가 기억하는 진솔한 서글픔을 음악에 빗대어 떠올리고 눈물짓게 된다. 심지어는 이 장면을 단지 묘사한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그들이 떠올렸을 진솔한 서글픔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다시 독자만의 진솔한 서글픔마저 떠올릴 수 있다. 손더스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함께 그 좋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작 어떤 글을 쓰고 있을 때에는 누구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도 어쨌건 써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진지한 마음으로 쓰게 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는 글에 자기 자신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에고'를 내세워 글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히 남들 앞에 드러내보려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감각에 대해 갑작스레 꺼내어 볼 용기 같은 것이 글을 쓰게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게 글을 쓰다보면 어떤 때에는 특히나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의도'보다도 더 앞서서 '분명히 이런 구조로 쓰면 내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가 뚜렷해질 것이다'라고 완전히 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어떤 기법들마저 발현되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는 정보와 서술의 축적이기도, 분산이기도, 반복이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형태와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의도한대로 쓰고자 한만큼 쓸 수 있다면 대단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그 기교가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사람은 글이 쓰여있는 것을 보면 읽는 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이게 뭐에 대해 쓴 글일까?'라는 최소한의 호기심을 갖게되기 마련이고 훑어보기도 들여다보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스쳐지나갈 수록 뭔가를 이미 읽어버린 마음에서는 반발이 일어나기도 하고 공감이 되기도 하고 잠시 의심스러워하며 유보하기도 하는 등의 의식들이 바쁘게 새로운 기억을 남긴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글이 타인에게 무엇을 남기게 될지는 미지수일 수 있으나 분명히, 내가 뭔가를 느낄 수 있는 만큼 타인도 자신만의 것을 느끼고 떠올려주리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무엇이든 꺼내어 볼 수 있는 용기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