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아닌 경험으로 남는 순간

<경험의 멸종> - 크리스틴 로젠 독후감

은정
2025-07-17 17:30
전체공개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가져온 변화들 가운데,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감각적 경험의 쇠퇴'를 지적한다. 편리함과 속도의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새 '경험'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보를 접하고, 화면 속에서 세상을 보는 일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몇몇 장면이 있다.
스페인 여행을 가고 싶었지만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보고, 여행 계획을 포기하며 'TV나 유튜브로 보면 돼'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지만, 정적 속 각자 스마트폰이나 TV를 보느라 대화는 거의 없었던 날.
같은 사무실에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기보다 사내 메신저로 텍스트를 주고 받는게 더 편하다는 동료들.

문득, '우리는 지금 함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단절된듯한 그 기묘한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 책에서 로젠이 말한 '편리함을 얻는 대신,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바로 그런 순간들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도구이지만, 그 도구에 삶의 중심을 내어주면서 정작 진짜 ‘경험’, 즉 몸과 감각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행위는 뒷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얼마 전 올해의 마지막 맨해튼헨지를 찍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맨해튼의 거리로 몰려들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름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삼각대를 세우고, 고급 렌즈를 장착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나름 인상 깊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건 맨해튼헨지를 경험하는 것일까, 기록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유하고자 하는 이미지일까?

로젠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어떤 장면을 '기억하기 위해'가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본 맨해튼헨지는 진짜 맨해튼헨지일까, 아니면 이미지로 소비되기 위해 재구성된, 우리 욕망의 대상일 뿐일까? 우리는 그 찰나의 장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기록을 위해 거기에 있었던 걸까? 맨헤튼헨지를 '기록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어야 할까, 혹은 기계여도 괜찮을까?

기록만을 위한 존재라면, 인간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틴 로젠이 말하는 '경험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록 자체는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경험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기계는 햇빛이 건물 사이로 스며드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기계는 이 순간이 아름답다는 감정이나, 기다림 끝에 마주한 찰나의 충만함을 기억하지도, 의미화하지도 못한다.

경험의 멸종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세계와 연결될 수 있지만 기술을 매개로 한 관계는 종종 비인간적이게 된다고 말한다. 기술이 기록은 대신할 수 있어도 경험의 감각, 그 자리에 머물렀던 기억, 그 순간을 함께 느꼈던 사람들과의 연결감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은 기계로도 충분하지만, 그것을 '살아 있는 순간으로 경험하기'에는 반드시 인간이 필요하다.


p.s. 좋아하는 말 중에 "혼자 하면 기억, 함께 하면 추억"이라는 말이 있어요. 경험의 멸종이 이야기하는 '진짜 경험'이 단지 오감의 문제를 넘어서, 타인과 함께 '존재하는 순간'의 깊이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의 본질을 간결하게 드러내는 말인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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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더듬이 | 16일 전
혼자 하면 기억, 함께 하면 추억. 간결하면서도 선명하게 와 닿는 댓구네요. 혼자선 기억, 나누면 추억. 요렇게도 바꿔 봅니다. 우리 함께 추억을 많이많이 쌓아가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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