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번역된 책에는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질문에 군살을 붙인다면, '소통하고, 제작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공감하는 경험을 통해 인류가 생존하고 문화와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경험이 기술을 매개로 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지금의 경향이 계속된다면, 개별 인간은 그리고 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가 된다.
어딘가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아서 검색해 보니(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는 않았다), '월-E'였다. 우주선 ‘액시엄(Axiom)’에 있는 인간들은 기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에 익숙해져 움직이지도 않고, 스스로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로 변한 것으로 묘사된다. '픽사'가 만드는 G 등급의 쓰레기장 디스토피아이다. '20세기 스튜디오'의 PG-13 등급 이상이 되면 '집단', '국가'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더 심각한 장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류가 거시적 차원에서 새로운 동적 균형에 도달할 것인지, 아니면 레밍처럼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는 집단 죽음으로 진행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살아갈 시간 정도로 시야를 좁히면, 인간의 본성에 따른 '편리함'의 추구가 오히려 성숙한 인간과 사회로의 성장을 가로막는 암담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마치, 본능이 요구하는 '식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면서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처럼.
저자가 지적하는 여러 측면의 경험의 소멸 중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부분은 '4장 기다림과 지루함의 기능'에 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날이 갈수록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집중력'을 유지하고, 천천히 '생각'을 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노화' 혹은 '에너지 부족'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하거나, 친구들과 있을 때 '예전 같지 않아'라고 서로 확인하면서 조금씩 안심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생활하고 생각해왔던 방식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부작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생존과 경쟁의 주된 수단으로 삼고, 천천히 살펴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회피해 온 결과인 것이다.
아주 짧은 틈새 시간도 채울 수 있는 너무나 많은 방법이 있다 보니, 기대 심리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다림을 기대보다는 지연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이제 기다림은 정상적인 인간 경험이 아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시간을 쉽게 채우는 데 익숙해지면 기대의 기회는 사라진다. 백일몽의 기회처럼 말이다.지연delay은 오늘날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더 이상 미덕(의지력이나 인내력의 발휘)이나 기회(반성이나 기대)를 암시하지 않는다. 지연은 불편을 의미한다.
오래 전에 변화에 뒤쳐지면 안된다는 걱정 때문에 소셜미디어를 시작했다가 그 시끄러움과 끊임없이 확인해야 번거로움에 지쳐서 금방 그만두었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가급적 일을 내려놓고, 그동안 바쁘다고 지나쳤던 것들을 찾아본다.
저자가 경고하는 흐름은 거침없이 계속될 것이고, 세상의 큰 흐름 속에서 각각의 개인은 무력하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각 개인의 작은 움직임들이기도 하다. 나는 불편하고 어렵지만 직접 경험하는 방식을 지키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그게 더 만족스럽게 느껴지고,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10여년 전 호치민 출장을 갔을 때 일이다. 큰 사거리가 아닌 곳에서는 사람들이 오토바이와 차량들이 지나가는 넓은 도로를 별도의 교통신호를 받지 않고 슬금슬금 혹은 느긋하게 건너고 있었다. 건너기를 망설이는 내게 그곳에서 오래 지낸 일행이 건너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차량이 오는 곳을 바라보면서 일정한 속도로 건너가면 알아서 비켜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퇴근시간 운전 기사는 연어떼처럼 도로를 흘러가고 있는 오토바이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고, 적당한 곳에서 슬금슬금 유턴을 했다.
"텔레파시"라고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은 모두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고,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거기 사람들도 열심히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을텐데 지금은 어떨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