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책에 이어 책에 대한 감상을 짧은 소설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기어이, 우려하던 날이 왔다.
2025년 여름에 읽었던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이 떠오른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일들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점차 사라져간다는 문제를 비판한 책이었다.
2025년 여름에 읽었던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이 떠오른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일들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점차 사라져간다는 문제를 비판한 책이었다.
그 여름날, 책의 중반쯤을 읽다가 지루함에 하품이 나왔고, 쩌억 입이 벌어질 때, 스윽 손을 자연스레 핸드폰 쪽으로, 부릅 눈은 핸드폰 잠금화면을 풀고, 쇽쇽 엄지손가락은 인스타그램 쇼츠를 넘겼다. 자동화. 지루함을 피하려는 것을 넘어, 쾌락을 좇는 뇌가 구축해 놓은 자동화 시스템. 내 몸은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어지간한 영상은 내 욕구를 채우기 어려웠지만, 그날은 눈에 띄는 영상이 하나 있었다.
부모님께 당장 공유해야 할 영상,
을 제목으로 한 뉴스 영상이었다. 리포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라산 천지의 괴물로 불리던 미확인 생물이 한강에 출몰했습니다… 뒤에 보시다시피 괴물은 한강을 헤엄치며…”
을 제목으로 한 뉴스 영상이었다. 리포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라산 천지의 괴물로 불리던 미확인 생물이 한강에 출몰했습니다… 뒤에 보시다시피 괴물은 한강을 헤엄치며…”
나는 ‘이게 뭐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여러분 속으셨나요? 저는 AI입니다”. 끝난 영상은 자동으로 반복 재생됐고, 그제야 화면 속 리포터와 배경이 지나치게 선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I로 생성된 사진과 영상은 실제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게 되었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 한라산 천지 괴물이 삼키듯 집어 삼켜지기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엄마에게 카톡으로 영상을 전송하고 통화를 했는데, 그래 그때만 해도 눈을 부릅뜨면 AI가 만든 영상인지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는데,
AI로 생성된 사진과 영상은 실제와 거의 구분이 가지 않게 되었고, 우리 부모님 세대는 초고속으로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에 한라산 천지 괴물이 삼키듯 집어 삼켜지기 나약한 사람들이었다. 엄마에게 카톡으로 영상을 전송하고 통화를 했는데, 그래 그때만 해도 눈을 부릅뜨면 AI가 만든 영상인지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는데,
2045년, 지금은 구분할 수 없다. ‘AI 프로그램 정보조작 방지 및 인간보호 특별법’(약칭: 인간보호법) 에 따라, 모든 AI 생성 사진과 영상 아래에는 'AI 제작'이라는 워터마크가 붙게 돼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워터마크가 거슬린다고 지우는 프로그램도 많다. 그리고 인간보호법은 더 이상 인간을, 우리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우리는 멀티 버스에서 살게 됐으니까.
나는 "우리 애만은 아닐 거야"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날이 오고 말았다. 우리는 '공상에 빠져도 된다'는 크리스틴 로젠의 조언을 걷어차고, 공상을 영상으로 만들고, 배포하고, 소비하는 세상을 들여다 놨다. 델포이의 신탁은 “너 자신을 알라.” 2025년, 소셜 네트워크의 신탁은 “너 자신을 보여라.” 2045년, AI 디지털 신탁은 “네 우주를 창조하라.”
제주도 한라산에 가고 싶다고 실제로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없다. 에펠탑에 오르고 싶다고 해서 파리에 가는 사람도 없다.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실제로 똥 치우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모두 가능하다. 승무원에게 여권을 보여주지 않아도, 에펠탑 앞 광장을 지나치지 않아도, 침대에 똥을 싼 강아지를 혼내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인류는 하루의 2/3를 AI 스타일러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AI 스타일러 안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꾸민다. 남이 만든 세계에서 좋은 건 따오고, 귀찮은 건 빼 버린다. 그렇게 프랑스를 경험하고, 제주도를 걷고, 강아지의 체온을 느낀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어차피 내가 얘를 프랑스 유학 보내줄 형편도 안 됐으니까…
그런데 오늘 저녁, 밥상머리에서, 그나마 하루 중 가장 소중한 몇 분 동안 우리 아들이 말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프랑스의 일부야.” 라는 말을 내 아들놈이 뱉어버린거다. 프랑스 선거제도를 우리가 따라 하고 있는데,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선거를 조작했다고 말하는 아들의 얼굴은 비장했다. 나는 녀석의 눈꺼풀과 광대를 내려다보았다. 이 세대는 이야기할 때 사람의 눈을 보지 않는다. 정면을 보긴 어려웠지만, 입술과 광대의 경직된 느낌으로 나는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어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밖에 세상에 속고 있다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놈의 뒷모습을 보고 아내와 나는 벙쪘다. 눈을 꽉, 아주 꽉 감았다 뜨고, 아내 얼굴을 보며 나는 물었다.
“여보, 여보는 지금 어디서 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