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는 순간의 피조물이고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이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시간의 피조물에겐 완전한 순간이 없다고 한다. 과거와 미래가 섞여 순간이 항상 혼탁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순간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우리 삶의 매 순간마다 시간의 화살은 우리를 창백하게 하고 죽게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우리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는 것이다.
- <철학자와 늑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요즘 시대만큼이나 온전한 순간을 사는 인류가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가 배제된 순간들로 삶을 채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킬링 타임'으로 불리는 (SNS, 게임, 오락 영화)등을 소비하는 '순간'이다. 뜻 그대로 '시간 때우기'이며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행위이기에 정말로 과거와 미래가 잠깐 잊혀진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어느 시대보다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라 지었는데, 여기서 '순간을 사는'이라는 의미는 '순간을 사는(live)'이 아닌 '순간을 사는(buy)'이다.
순간을 사는(buy)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구독과 같은 형식으로 서비스를 구매하거나, 주의력을 지불(자신은 공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고 순간을 사는 사람들인데, 그 순간은 노력 없이 얻는 아주 편안한 순간이다. 나는 이들(나를 포함하여)에게 오히려 시간의 피조물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순간을 보내는 것은 뒤에서 밀려오는 과거와 앞에서 밀려드는 미래에 대한 고민의 물살을 잠깐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행위다. 그 '값싼 순간'이 끝나 손을 때는 즉시 압력이 더해진 과거와 미래가 이전보다 더 강하게 '지금'으로 밀려든다.
나는 이런 삶을 '예습과 복습 없는 삶'이라고 부른다. 너무 오래된 과거에 매여있거나 오지도 않은 먼 미래에 두려움을 떨자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어제, 내일, 지난 주, 다음 주 정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해나가야 한다는 뚯이다. 어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머릿속으로 복습(회고)을 해보지 않거나, 내일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예습해 보지 않는 삶에는 많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삶이 하루하루 더 해질수록 문제는 불어나고 꼬여버린다. 결국 문제들에 압도되어 값싼 순간들로 다시 도피하게 된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값싼 순간들에 중독되어 '예습과 복습 없는 삶'이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삶의 문제가 커져 다시 값싼 순간들로 도피한다. 이 과정에서 삶의 여유가 점점 사라지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방치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순간을 사는(live)' 사람이 되긴 어려워진다. 구매한 순간은 외주(outsourcing)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무섭게 밀려드는 미해결 문제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의미 있는 순간은 자신의 힘(의지)으로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미해결 문제가 밀려들면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의미 있는 순간을 살기 위해서는 더욱더 예습과 복습을 하는 사람이 되어 현실적인 문제를 잘 관리해야 한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현실적인 문제를 어디 까지로 볼 것인가?"이다. 아무리 해결해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계속 현실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럼 평생 의미 있는 순간에 빠져들 수 없는 걸까? 이것은 욕심의 차이로 보인다. 적당히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로 혹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문제 해결만 하고 순간을 사는(live) 것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장 상징적으로 생각나는 인물로는 월든 호숫가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가 0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 의미 있는 순간을 짓누르지 않을 정도로 가벼이 만드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순간을 사는(buy) 사람이 아닌 순간을 사는(live) 사람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