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닌과 나의 속도

<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독후감

은정
2025-08-14 22:36
전체공개
나는 늘 계획을 세우고, 손익을 따지고,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일하는 방식이 그렇다보니 어느 순간 사적인 영역에서도 다음을 준비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다.
그런데 책 속 늑대는 그 모든 계산법을 비웃듯, 매 순간을 그 자체로 살아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바람 냄새를 맡고,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느끼는 데 몰두했다.

책에서 인간을 영장류에 비유하며 관계 속 서열, 인정욕구, 계산된 호의 같은 것들을 꼬집는다.
읽다 보니 조금 뜨끔했다. 일을 하다 보면, 내가 관계를 맺기 위해 만드는 메시지들도 결국 누군가의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설계가 된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데이터나 행동 패턴으로 환원해 버린 적이 있다.
브레닌이 보여준 무조건적인 유대는, 그런 내 습관에 균열을 냈다.
관계가 거래가 아니라 ‘함께 있음’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이 준 가장 큰 울림은 속도의 전환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일과 삶 속에 ‘늑대적 순간’을 끼워 넣기로 했다.
회의 전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답장을 기다리며 잠깐 창밖을 볼 때. 이 순간만큼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 감각 안에 머무는 것이다. 냄새, 소리, 공기, 빛.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시간.

미래를 향한 나의 속도는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그 속도 속에 브레닌의 걸음을 한두 번 섞어 넣으면, 내 하루는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 같다.
목표와 계산을 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법.
어쩌면 그것이 인간인 나와 늑대인 브레닌이 서로에게 배워야 할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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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A동 부사감 | 4일 전
영장류의 삶의 방식에 '늑대적 순간'을 끼워 넣기로. 목표와 계산을 품은 채,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법. 그것이 인간인 나와 늑대인 브레인이 서로에게 배워야 할 방식인지도 모른다는 데 공감합니다. 산다는 게 어떤 무예를 익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문득 드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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