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월 마지막 날.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식이가 응급 수술을 받아야 해서 큰 동물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식사와 활동이 조금씩 줄어들고 밤눈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의사는 우선 문제가 된 장기를 떼어냈지만 이미 암세포가 여기저기 전이가 되어 있어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몇 번에 걸친 항암치료로 육체와 의식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독한 주사와 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현식이는 며칠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난 십여 년간 오가던 고수부지 산책 코스를 걸었다.
4월 마지막 날. 병원 응급실에서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현식이를 받아 들었다. 아내는 눈을 감겨서 현식이가 무서워할 거라고 걱정했다.
그 이후로 늘 궁금했었다. 그 '치료'는 잘 한 것이었을까? 나는 괜찮은 동거인이었을까?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나를 향하던 관심과 반가움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떠나는 날 아침에도 여상하게 같이 산책을 나설 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이 책은 늑대, 늑대개와 함깨 지내면서 있었던 일에 대한 관찰기록이면서, 그 과정에서 늑대와 영장류의 본질과 실존에 대해 고민한 철학서이면서, 이성과 지성, 도덕과 악, 고통과 행복, 욕망과 죽음에 대해 깨달은 바를 전하는 잠언집이다. 그리고, 나는 관찰기록을 먼저 읽고, 철학서를 다음으로 읽고, 잠언집을 마지막으로 읽는다.
내가 궁금해했던 그것들에 대해 이 '괴짜 철학자'는 늑대에게는 그들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영장류의 방식으로 걱정해 줄 필요가 없다고 위로해준다.
두려움은 바로 내가 브레닌에게 가해야 하는 고통 속에 있었다. 두 시간마다 브레닌에게 가한, 아무 소용 없을 것이 거의 확실했던 그 고통 말이다. 고통의 핵심은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내가 느낀 외로움은 아니다. 내 외로움은 그 고통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바로 나의 늑대가 느꼈을 외로움이다.
가장 큰 두려움은 나의 늑대가 더 이상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라는 데서 왔다. 자기를 사랑해 줘야 할 사람이 며칠이고 고문을 했다고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나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진정한 의도라는 게 있기나 한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알 게 뭔가?
나는 브레닌을 나 자신이 암에 걸렸으면 어땠을지와 자꾸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다. 브레닌에게 암이란 순간의 고통이었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브레닌은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순간, 가령 한 시간 후에 그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을 그 자체로 완성시키고 있을 뿐, 그 순간들은 서로 아무 연관이 없다. 반면 나에게 암이란 순간의 고통이 아닌 시간의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암 또는 다른 중병이 주는 공포가 연속된 시간에 걸쳐 존재하는 것이다. 그 공포는 욕망, 목표, 과제라고 불러 온 내 화살들이 꺾여 버리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데서 온다.
그러나 누구도 이름을 불러 준 적 없는 훨씬 심오하고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 있다. 각자의 개성에, 그리고 그 개성이 발현된 삶 속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기억이다.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게 이 책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제 처음에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을 다시 읽는다.
우리는 늑대의 그림자 속에 서 있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방법은 두 가지다. 빛을 막거나 아니면 광원이 되어 다른 물체에 막히는 것. 나는 사람이나 빛이 만드는 그림자를 말하고자 한다. 늑대의 그림자란 늑대가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니라 늑대가 발하는 빛 때문이 인간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말한다. 그리고 이 그림자 속에 서서 우리를 뒤돌아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노란 색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란 색의 파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노란 색은 파란 색, 빨간 색과 구별되기도 하지만 소리와 같은 매질과 파장이 다른 것과 비교되었을 때 더 풍부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인간과 그 행동은 다양한 인간 개체를 통해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영장류라는 집단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통해 혹은 다른 포유류 집단에서 나타나는 행동과의 비교를 통해 더 잘 설명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설명 방법을 사용하면 자유도가 높아 진다. 무엇을 비교할 것인지 우선 연구자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오랫동안 유심히 관찰하고 깊이 생각했던 늑대의 행동(빛)을 통해 인간의 행동(그림자)를 설명한다. 무척 잘 설명한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늑대의 행동이 그런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유와 다른 무엇이 있고 그것이 인간 스스로가 싫어하는 본질과 다른 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늑대의 어떤 본질 혹은 실존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도 인간은 결코 늑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늑대가 인간 영혼의 빈터와 같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 늑대는 우리가 규정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 숨은 이면, 즉 우리가 주장하는 인간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저자는 인간은 스스로를 늑대, 그리고 다른 영장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냥 다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인간의 우월성의 근거로 제시하는 이성과 지성, 도덕성, 사회계약 등이 그 출발점과 종착점에 있어서 선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으며 잘 지켜지지도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집단생활을 하면 새로운 기회와 그에 따른 의무가 생긴다. 첫 번째 기회는 동료를 이용하여 적은 비용으로 집단생활의 혜택을 얻는 것이다. 그 주된 방법인 속임수를 잘 써야 동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 또 다른 기회는 동료와의 연합이다. 영장류 사회에서 연합은 특정 구성원을 이용하여 다른 구성원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계략을 짜는 능력이 필요하다. (...) 곧 영장류의 사회적 지능의 핵심은 속임수와 계략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늑대는 이런 진화의 경로를 밟지 않았다.
늑대는 말을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이해하기도 쉽다. 늑대들이 못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늑대는 문명사회에 맞지 않는 것이다. 늑대도 개도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월성이란 정당화할 만큼 객관적인 가치가 아니다. 일단 우월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는 의미를 잃는다. 그저 인간이 더 우월한 것, 늑대가 더 우월한 것이 다를 뿐, 우월성의 다양한 정의를 판단할 보편적 기준은 없다.
이후의 행복과 시간, 죽음에 대한 부분은 무엇이라 평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것이 실천적 차원에서 아직 종교적 잠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이야기 부분을 모두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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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매일 아침과 저녁, 이제 혼자 남은 서리와 함께 산책을 나간다. 보호소 생활 경험이 있어서인지 좀 더 역학적 세계에 살고 있는 이 검은 녀석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다닌다. 현식이는 마법의 세계에 살면서 마법사인 나와 늘 눈을 마주치면서 걸었었다. 이 멋진 생명체가 순간을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으면, 그걸 조금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턱관절이 팽오쇼콜라를 씹고 있을 때는 그 순간 자체로 완벽한 것이다. 시간 속에 퍼져 있는 다른 어떤 순간들과도 섞이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다.
영원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보존하고 보증하는 것이 니나의 삶에 걸친 임무였다. 니나는 변화나 일탈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진정한 행복이란 변하지 않는 것, 똑같은 것, 영원 불변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우연성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들이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깊은 구덩이를 파내기 때문이라고. 그 구덩이 속에는 영장류가 되기 이전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때 늑대였던 우리의 모습이다. 이 늑대는 행복이 결코 계산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 늑대는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먼저 신의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한다. 계산과 계약은 항상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속의 영장류는 결코 늑대보다 먼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